오피니언 사설

근로시간 단축, 노사합의가 우선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근로시간 단축 문제가 올 노사관계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노(勞)·사(使)·정(政)과 여야 정치권은 현행 주당 68시간까지 허용된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인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법정근로시간인 주당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합쳐 1주일에 최장 52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여야는 노사정이 세부사항에 합의하면 곧바로 근로기준법 개정에 들어갈 태세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던가. 큰 틀에서 근로시간을 줄이자는 원칙에 대한 합의와는 별개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세부쟁점에 대해서는 노사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크다.

 지난 1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사정 소위가 개최한 근로시간 단축 관련 공청회는 그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이런 상태에서 무리하게 근로시간 단축 입법을 강행하면 노사의 반발은 물론, 산업현장에서의 혼란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근로시간 단축 관련 입법에 신중해야 할 이유다.

  세계 최장 수준(연간 2092시간)인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데는 노사정이 이견이 없다. 그러나 막상 근로시간을 줄이는 방법에 들어가면 선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생산성이 올라야 한다. 그런데 한국 근로자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미국이나 독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단시간 내에 줄어든 근로시간을 상쇄할 만큼 생산성을 높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으로선 결국 임금을 깎아야 하는데 노동계는 기본급을 올려 현재의 임금수준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부터 벌써 노사 간의 간극을 줄이기 어려워 보인다.

  휴일근로수당도 문제다. 최장 근로시간이 줄어들어 휴일근로까지 연장근로로 간주될 경우 기업들은 휴일근로수당에 연장근로수당을 할증해서 줘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렇게 되면 기업들이 종전보다 7조5909억원을 더 부담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이처럼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면 당장 추가 고용 여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투자가 줄어 근로시간 단축에 의한 고용 증대 효과도 없어진다. 사정이 이렇다면 근로시간을 줄이는 실익이 없지 않은가.

  규제는 최소화하고 자율은 최대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노사 간의 입장 차이가 현격한 마당에 무리하게 근로시간과 관련된 세부 사항을 일일이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보다 앞서 근로시간을 줄여온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1980년대 이후 법정근로시간을 대폭 줄이면서 연장근로에 관해서는 노사 간의 자율적인 합의를 폭넓게 인정해줬다. 개별기업과 직종의 특성을 감안해 노사가 자율적으로 합의한 연장근로한도를 최대한 존중한 것이다. 우리도 근로기준법 개정 과정에서 근로시간 단축을 강제조항 대신 권고사항으로 규정하고, 연장근로는 노사 간의 합의를 우선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