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할퀸 자국에 재기의 삽질-완주 고안부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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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극심한 가뭄끝에 예기치않은 수해를 당한 전북도민들의 수해복구현장에는 자연에 도전하는 집녑이 곳곳에 서려있다.
마을마다 수마가 할퀸 자국을 손질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바쁘고 한톨의 쌀, 한줌의 잡곡을 더 거두려는 안간힘이 계곡마다 물결친다.
불과 한달사이에 한해와 수해의 이중재해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호남곡창은 지금 이웃의 관심과 띠뜻한 손길이 무엇보다도 아쉬운 때다.
전북도가 10일 집계한 도내 수해현황은 사망29명, 부상16명, 이재민 1천1백68밍이며 총 피해액이 무려 9억5천60여만원에 이른다.
전북도내에서 가장 피해가 큰 지역은 총 피해액이 7억7천8백여만원을 넘는 완주군일대.
10시간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진 1백80mm의 폭우로 고을마다 산사태와 침수소동을 빚었다.
9일하오 7시 땅거미가 질 무렵의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 객사고안부락 수해복구 작업현장은 상부상조 정신의 본보기였다.
전주시내에서 동남쪽으로 4km 떨어진 전형적인 산간마을. 해발 6백22m의 고덕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봉우리 10여개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하늘이 손바닥만큼 해 보인다. 『마을이 온통 산에서 밀려내린 토사와 뿌리째 뽑힌 20년생 소나무로 뒤덮여 있지.』 수해지구를 안내하던 완주군청 농산과 농사계장 이춘길씨(35)의 어조는 갑자기 우울해진다. 남원선 포장도로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폭3m·길이3km의 농로가 형체도 없고 바윗덩이와 토사가 뒤덮인 논발에는 뿌리째 뽑힌 소나무·오리나무·참나무·「아카시아」 나무 등이 앙상하게 나뒹굴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비탈에는 크고 작은 산사태가 50여군데나 있어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있다. 마을 중간에 자리잡은 소류지(보)는 산에서 밀려내린 토사로 메워져 5m 깊이가 1·5m로 얕아졌다. 『마치 바가지로 물을 퍼붓는 것 같았어. 바짝 마른 땅덩어리에 삽시간에 많은 물을 쏟았으니 산사태가 안날리 없지. 병자년(1936년) 수해이후 40년만에 처음인 것 같아-. 』
일생을 줄곧 객사부락에 살아온 마을노인 김상윤씨(83)는 장죽대로 뒷산 객명골을 가리키며 당시의 절박한 장황을 설명했다.
『영차영차….』 폐허가 된 산계곡을 타고 메아리 치는 주민들의 복구작업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구릿빛 얼굴의 주민 1백여명이 호미·곡괭이·삽 등으로 흙을 파서 지게·우마차 등에 싣고 운반하며 유실된 농로를 개설하느라 해지는 줄 모른다. 모랫더미 속에 파묻힌 수박·참외·복숭아를 건져내고 산중턱에서 무덤째 뗘내려온 상석·망부석을 고르며 무심한 하늘을 쳐다본다. 뒷산 성주걸의 산사태로 4남 안춘식군(14·상관중1년)과 초가집 삼간을 졸지에 잃은 한정순씨(55·여)는 뼈를 깎는 슬픔을 딛고 곡괭이를 휘두르며 복구작업에 여넘이 없다.
과수원 3천4백여평이 산사태로 결딴이 난 오동표씨(37)는 흙더미에 반쯤 잠긴 복숭아나무2백50그루·포도나무 1백50그루를 건지려고 열심히 삽질을 한다.
이마을의 경지면적은 논11ha·밭초18ha이며 주민수는 28가구에 1백40명 (남76·여64명) . 수박·참외·뽕나무 등 특용작물 외에 특별한 부업이 없이 자급자족하며 근근히 생활하고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이번 폭우로 전답의 절반을 유실 또는 매몰당한 주민들은 당장 생계가 아득하다며 살아갈길을 걱정한다. 너무 엄청난 수해여서 주민들의 자력으로만은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실정. 주민 유언년씨 (68)는 『밭6백평과 논3백평이 몽땅 매몰되어 복구한디해도 올해 농사는 채소밖에 가꿀수 없어 끼니를 이을 양식이 걱정』이라며 한숨을 지었다.
이강 김순곤씨(38)는 『주민들의 자조정신은 이제 한계에 도달해 있다』며 『당국의 성의 있는 지원과 국민의 따뜻한 손길이 무엇보다 아쉽다』고 호소했다. <본사특별취재반=김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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