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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 좌담 전쟁과 예술|민족비극을 다룬「명작」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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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25동란 26주년. 이제 전쟁의 상흔은 대부분 가셨지만 그 비극의 의미는 우리 민족 누구나의 가슴속에 아직도 깊이 새겨져 있다. 예술을 통해 표출된 6·25의 모습에서 그 비극의 의미가 더욱 심화되는 것이라면 지난 26년 동안의 예술활동에서 6·25의 의미가 얼마만큼 부각되었는가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6·25 26주년을 맞아 각계 중진예술인들의 좌담을 통해 예술 속의 6·25를 더듬어본다. <편집자주>
사회=전쟁을 부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기존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예술가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본다면 인간본래의 적나라한 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새로운 질서라고도 말할 수 있겠읍니다. 6·25동란이 일어나던 해인 50년은 우리 예술계가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려던 서기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한국예술과 6·25동란은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백=일제치하의 36년을 겪기도 했지만 6·25동란은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비극을 예술로써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읍니다. 다소 과장되게 이야기한다면 한국문학은 6·25동란을 계기로 깊은 인간적 체험의 경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6·25를 소재로 한 우리의 전쟁문학이 전쟁문학다운 가치를 제시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때 그럴듯한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는 어렵겠읍니다. 흔히들 전쟁문학은 전쟁을 겪은지 10년 내지 20년이 지나야 본격적인 것이 나올 수 있다고들 이야기하는데 26년이 지나도록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은 우리의 현실이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거시적으로 파헤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6·25를 담은 큰 작품이 나오려면 남북통일 이후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전=음악분야에서는 6·25동란 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았읍니다. 6·25동란 속에서 활약한 육군교향악단이나 해군 정훈 음악대가 이후 국립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 창단의 원동력이 된 것이 그것이지요. 아마도 6·25동란이 없었으면 많은 인재들이 악단에 나서지 못 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악단에 나섬으로 해서 음악활동을 통한사명감과 자부심이 크게 눈에 띄었읍니다.
사회=일본의「후지다」처럼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만 그리는 화가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전쟁을 직접 체험한 우리나라 화가들의 경우는 어떤가요.
변=예술계 각분야를 통해 미술계만큼 많이 잃은 분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동란 중 전통미술의 소실은 전통미술의 단절을 초래했지요. 이 때문에 우리 미술계는 사조면·주제 면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어야 했는데요, 6·25동란으로 서구와의 교류가 활발해 가면서 우리 화단도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됐는데 이 무렵 서구화단의 반 전통의식이 젊은 층에 깊숙이 침투한 것입니다.
6·25가 없었으면 반 전통의식이 바탕이 된 추상회화의 도입은 훨씬 뒤로 미뤄졌을 것입니다.
전쟁을 소재로 한 기록화가 몇 있지만 이 얘기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사회=전쟁을 통한 문화교류는 어차피 큰 역할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참했던 것은 연극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약점이지만 어쨌든 연극만큼은 6·25동란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 했던 것 같아요.
백=전쟁이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50년대의 문화교류라고 해서 모두 6·2동란과 연관지을 수는 없겠지요. 가령「사르트르」의 실존주의도 6·25동란을 계기로 도입됐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 도입된 것은 6·25동란보다는 몇 년 전이었어요
사회=영향을 받았다면 음악계가 가장 두드러질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서구의 대중음악과 우리 고유음악과의 관계에서….
전=6·25동란이 발발한 것은 우리 음악계에서 한국적「르네상스」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그 당시 서구대중음악의 폭포 같은 유입은 오히려 우리 것을 지켜야겠다는 저항적 요소를 나타나게 했습니다. 그 무렵의『왕자호동』(현제명)『콩쥐 밭쥐』(김대현)등 고전「오페라」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특히『왕자호동』은 국난을 당했을 때의 처절한 상황을「리얼」하게 묘사하여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사회=전쟁을 몸소 체험한 예술인들과 전쟁을 체험 못한 예술인들이 6·25를 예술로 다루는데 있어서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백=체험 그 자체가 문학은 아니지만 실제로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큰 차이가 있겠지요. 휴전후인 5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 전쟁문학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등장한 사람들은 대체로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읍니다.
변=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체험여부는 분별의 유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읍니다. 가령 6·25동란을 계기로 도입된 반정통의식의 추상회화가 무분별한 도입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수용한 층이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전=전쟁 때문에 서구의 흐름이 빨려 들어왔는지는 모르나 음악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소음이 젊은 층에 음악으로 받아들여진 따위의 일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지요.
사회=6·25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이 무작정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현상은 생각해 봐야할 문제겠지요.
이들은 기성세대가 안정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과감한 형식을 추구하려하지 않는다고 반발했는데….
백=그러나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채 해내지 못한 작업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체험이 야기라면 그 한계가 불분명한데 반드시 총을 들고 전장에 나선 것만이 체험이 아니라면 젊은 층은 반드시 체험 못한 세대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사회=그럼 6·25전쟁이 실질적인 예술활동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고 이야기를 끝내기로 하지요. 6·25가 직접 소재로 나타났다면 영화만큼 6·25가 많이 등장한 분야도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6·25를 다룬 그 많은 영화가운데서 예술적인 수준 높은 작품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은 아까 백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현실의 제약 때문이겠지요. 반면 연극에서는 유치진씨의『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작품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요.
백=전쟁문학을 정리하는 데는 곧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는데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반공소설이 곧 전쟁문학이라는 개념이 그것이지요. 본격적 전쟁문학이기 위해서는「휴머니즘」에 반대되는 파고드는 전쟁문학이어야 합니다. 황순원씨의『카인의 후예』, 임옥인씨의『월남전후』같은 작품은 전쟁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쟁으로 영향을 받은 성공한 작품들이지요.
소=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은 없었지만 정경화·김영욱 등 천재음악 소녀소년들이 6·25때문에 내한했던 외국인들에 발굴되어 성공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겠지요. 군가를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변=전쟁을 사실적으로 다룬 기록화가 여럿 있긴 합니다만 군가를 예술이 아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것도 우선은 기록일 뿐일 따름입니다. 그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별도로 이야기돼야겠지요.
참석자<가나다순>
백철<「펜·클럽」한국본부회장> 변종하<화가> 이근삼<서강대교수·사회> 전봉초<서울대음대학장> 기록=정규웅 기가·23일 본사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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