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차라리 “눈물의 씨앗”이라고, 저 먼 1960년대 나훈아의 히트곡 가사를 빌려 눙치는 게 나을 뻔했다. “사랑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은 그럴 수 없었다. 국가기관인 데다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권위 있는 사전을 펴내는 곳이기에 말이다.

재작년에 경희대생 5명이 사랑·연애 등 5개 단어의 뜻풀이가 “남녀 간 관계에만 한정돼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무시한다”며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국어원은 이를 받아들였고, 당시 언론들도 의미 있는 변화로 여겨 크게 보도했다. 사랑은 종전의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에서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포괄적이고 성(性) 중립적인 정의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결정이 다시 뒤집혔다. 국립국어원 언어정보과의 황용주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낱말풀이 변경은 여러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표준국어대사전 홈페이지에 딸린 ‘의견 보내기’ 난이라든가 국어생활종합상담실에 접수된 온라인 의견, 네이버가 보내준 사용자 여론, 국민신문고 등에서 수집한 것들을 종합해 표준국어대사전 정보보완심의위원회에 안건으로 올린다. 논란이 분분하면 외부 전문가, 자문위원들에게도 물어본다. ‘사랑’의 여러 뜻 중에서 성적인 애착을 가리키는 분야가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로 바뀐 것은 이런 과정을 다 거친 올해 1월 말이었다. ‘어떤 상대’에서 ‘남녀’로 주체가 달라졌다. 사랑·연애·애정·연인·애인의 5개 단어 중 앞의 3개는 남녀 간 행위로 되돌려졌고, 연인(‘서로 연애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또는 몹시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애인(‘서로 애정을 나누며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몹시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 남았다. 다소 비틀어 해석한다면 동성애자들은 사랑할 자격은 없지만 연인이나 애인 대접은 간신히 받게 된 모양새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들 할까. 미국의 웹스터 사전은 사랑(love)을 ‘두 사람의 성적인 감정이나 활동’으로 풀이한다. 옥스퍼드 사전을 들춰보니 ‘성적으로 끌리는 누군가(somebody)에 대한 강한 애착의 감정’이라고 해놓았다. 롱맨 사전도 ‘어떤 사람(someone)에 대한 강한 연애감정’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표적 사전인 고지엔(廣辭苑)은 다르다. 사랑(愛)을 ‘남녀 사이에 상대를 그리워하는 정’으로 정의했다. 황용주 학예사는 “일본 사전 중에도 남녀 구분을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정의한 게 있다”면서도 “대체로 동양 사전들은 남녀를 명시했고, 서양 사전들은 포괄적인 기술이 많더라”고 했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동성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편이 아니다. 다만 선천적으로 어쩔 수 없이 동성애 성향을 타고나는 경우가 있다는 정도는 안다. 이성애자로서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상관할 일이 없겠다는 쪽이다. 성향으로 인해 차별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는 입장이다. 보수적이라는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조차 “만일 동성애자인 사람이 선한 의지를 갖고 신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성직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던 육군 사병이 동성애 성향을 고민하다 “저는 부끄러운 죄인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지난해 1월 충남).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정당의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도 “동성애·동성혼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공약하는 형편이다(2012년 12월 민주당).

 국립국어원 측은 이번 재변경에 대해 “2012년에 바꾼 게 너무 포괄적이어서 전형적인 뜻풀이가 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기류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어원의 한 관계자는 “일반적 형태가 아닌 사랑을 전통적 사랑과 대등하게 보거나 격상시킨 것처럼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사태가 동성애 논란으로 번진 데 대해 매우 당혹하는 눈치다. 그는 “국어원은 힘없는 기관이다. 사실 이래도 저래도 욕을 먹을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사랑’의 뜻풀이 논란은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말의 쓰임새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의 범위는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더 넓어질까 아니면 지금보다도 좁아질까. 의미를 축소한다고 다양한 형태의 사랑들이 사라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은 넓고 다양한 쪽 편을 들 것 같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