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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익 100억 회사를 빚더미에 … 악덕 기업사냥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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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536억원’. 강원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기업사냥꾼이 된 최모(52)씨가 지난 2년간 횡령한 코스닥 기업 2곳의 회사돈 규모다. 그는 주로 기술집약적 제품을 생산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코스닥 상장 기업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코스닥 기업들은 자본 규모가 크지 않아 경영권 획득이 쉬운 데다 주가가 쉽게 요동친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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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2월 최씨는 사채업자들을 동원해 삼성전자에 터치스크린을 1차로 납품하던 디지텍시스템스를 사들였다. 2012년 매출액 2368억원, 당기순이익 103억원을 올린 건실한 회사였다. 공장 2곳을 가동하며 ‘저항막 터치스크린 패널(TSP)’을 국내 1위로 생산했다. 최씨는 남모(39) 전 재무담당이사를 통해 디지텍시스템스 자금 160억원, 자회사 티엔스 자금 10억원 등 170억원을 횡령했다. 자본 없이 회사돈으로 다시 그 회사를 사들이는 전형적 ‘무자본 M&A’ 수법이었다. 협력사와 가짜 거래를 꾸며내거나 허위로 설비를 구입한 것처럼 장부를 위조했다.

 최씨는 휴대전화 배터리제조사 엔피텍을 그 다음 타깃으로 삼았다. 인수에 필요한 자금 110억원이 디지텍시스템스에서 빠져나갔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대출 지급보증을 회사가 서게 하는 방식 등이 사용됐다. 이후 디지텍시스템스에서 196억원을, 엔피텍에서 170억원을 추가로 횡령했다.

 이로 인해 디지텍시스템스는 최씨가 인수한 지 2년 만에 주식거래가 정지됐다. 현재 상장폐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연체된 회사 빚만 820억원에 달한다.

 2012년 매출액 2076억원, 당기순이익 31억을 기록했던 엔피텍 역시 지난해 말 1차 부도를 맞고 지난달 전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부장 김범기)는 최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고 7일 밝혔다. 2006년 코스닥 상장사 ㈜고제를 인수하는 과정에 개입해 70억여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되는 등 동일 수법으로만 네 번째 범행이다.

검찰 조사 결과 금융권에 발을 들인 적도 없던 최씨는 2000년대 초 이른바 ‘벤처붐’이 일 때 처음 주식에 눈을 떴다. 2004년 주가조작 혐의로 첫 징역형을 선고받고 나서부터 전문 기업사냥꾼의 길을 걸었다.

사채를 끌어 회사를 인수하고, 회사 사정에 밝은 전·현직 경영진을 끌어들여 주가를 부양한 뒤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최씨의 범행 수법이었다.

 ‘기업사냥꾼(corporate raiders)’은 1980년대 미국에서 악명을 떨치며 세간에 존재를 알렸다. 한국에서는 최씨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2000년대 중반 등장했다.

‘수퍼개미’로 이름을 날린 경대현(60)씨가 원조 격이다. 경씨는 기업지분 대규모 매입→경영권 참여 후 분쟁 유도→주가 부양→시세차익 획득이라는 전형적 기업사냥의 매뉴얼을 만든 인물이다. FYD·디웍스글로벌 등을 상장폐지시킨 경씨는 지난해 자재 및 플랜트 생산기업 AJS를 인수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한 기업이 두 차례 연속해서 범행 타깃이 되기도 한다. 지난해 증권범죄합수단은 2010년 부동산 시행업자에게 빌린 돈으로 전자장비 제조업체 글로스텍을 인수해 48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하모씨 등 2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또 다른 기업사냥꾼 주모씨에게 회사를 넘겼고 주씨는 154억원을 추가로 횡령했다. 회사는 상장폐지를 앞두고 있다.

심새롬 기자

◆기업사냥꾼=기업 인수합병 전문 투자자를 일컫는 말. 최씨처럼 기업 가치를 폭락시키고 개인 이득을 챙긴다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인다. 주식을 대규모로 사들여 인수 위협을 한 뒤 주가가 오르면 시세차익을 얻는 전통적 기업사냥꾼은 ‘그린메일러(green mailer)’라고 부른다. 썩은 고기를 파먹는 대머리 독수리(vulture)처럼 부실기업만 골라 사냥하는 경우 ‘벌처 투자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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