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앞에 놓인 대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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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호 31면

소치 겨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우크라이나 위기가 터졌다. 벌써 몇 달째, 전 세계가 러시아 관련 뉴스에 주목하고 있다. 난 러시아인이다. 크림반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러시아인인 만큼 많은 생각이 든다. 우선 드는 생각. 크림반도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왠지 데자뷰 같았다.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거나 어디에선가 이미 본 것 같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러시아 역사에서 크림반도 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가 유럽이나 중동·아프리카·인도로 이어지는 흑해 루트를 이용하기 위해 벌인 크림전쟁(1853~1856)이 있다. 당시 상황과 21세기 지금의 상황은 닮았다. 우선 1850년대 러시아의 흑해 진입을 반대했던 국가들이 지금도 똑같은 입장이다. 19세기엔 영국·프랑스와 독일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반대편에 섰다. 전쟁의 결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손에 넣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했고 경제적 손실도 크게 입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각국이 취하고 있는 입장과 언론의 태도, 상황이 빚은 결과가 너무 비슷하게 느껴진다.

19세기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이겼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국제사회 비판의 대상이 된 금융·산업·사회제도를 바꾸기 위해 고통도 감내했다. 그러나 20년 넘게 노력한 덕에 러시아라는 국가는 튼튼해지고 큰 영향력을 얻게 됐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다시 유럽의 강대국 위치를 탈환했고 세계 무대에서 영국·프랑스와 경쟁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자국 땅으로 편입시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서방국들과 미국은 여러 경제 제재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갈수록 비슷한 제재는 더 많아질 게 확실해 보인다. 외부에서 계속 장애물과 맞닥뜨린다면 러시아는 내부로 눈을 돌려 내재적 발전을 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듯하다.

오늘날의 러시아엔 2000년대 들어 외부 지향적 발전 모델을 추구해오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이 누적돼 있다. 높은 천연자원 의존도와 제조업의 미진한 발전, 지역 간 발전 격차, 둔화하는 성장세, 미진한 인프라, 사회 양극화 등등의 문제들이다. 이를 해결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그러나 우크라이나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상황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금융 부문이다. 러시아엔 2000년대 급성장한 자원 수출 덕에 축적된 자본이 제법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더군다나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하려 할 경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국가 리스크가 높아진 것도 있지만 경제 제재로 인해 주요 국제은행에서 대출받는 것이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게 큰 변수다. 달리 말해 러시아는 현재 갖고 있는 재정 이외엔 동원할 수 있는 다른 재원이 별로 없다. 국가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국가 재정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특히 앞으로 몇 년간은 정부 지출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러시아는 재정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덴 약했다. 러시아가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다시 역사를 돌아보면 19세기 후반, 러시아가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 덕분이었다. 보통 수준의 개혁이 아니라 국가의 근본적 제도를 바꾸는 극한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포괄적 개혁이었다. 21세기의 러시아는 지금까지 이런 포괄적이고 대담한 개혁을 해본 적이 없다. 러시아가 어떤 길을 택할지, 아직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러시아는 앞으로 10년간은 고생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이 역시 역사의 교훈이다.



이리나 코르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국제경제대학원을 2009년 졸업했다. 2011년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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