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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프리카계 한국인'의 비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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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필자의 경희대 동료인 에드 리드 교수는 얼마 전 인천공항에서 목격한 광경을 들려주었다. 한 흑인이 출입국 심사장의 ‘한국인’ 심사대 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세 명의 한국인이 차례로 그에게 다가가 곁에 있는 ‘외국인’ 전용 창구 쪽에 줄을 서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무척 언짢은 듯했으나 완강히 버티고 서있었다. 이윽고 그가 출입국 심사를 받을 차례가 왔다. 알고 보니 그 ‘흑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어엿한 한국인이었다.

 한국에서 ‘다문화’는 보통 동남아나 중국 출신의 외국인 아내와 한국 남성이 이룬 가정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릇되게 통용되고 있다. 물론 이들 또한 한국 문화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들 가정만 다문화라고 하는 건 분명 어폐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타 문화를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는 포용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다문화의 기반은 외국인들을 수용하고 변화시키는 것뿐 아니라 해외 동포, 입양아 심지어 북한 동포들까지도 끌어안는 포용적인 문명이어야 한다.

 국제화가 성공하려면 원래 있던 전통을 현대 사람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전통적인 가치 체계, 철학, 문학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문화가 싱가포르나 홍콩과 전혀 차이가 없다면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자부심과 사랑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문화 한국 사회는 이곳을 조국으로 여기게 된 모든 귀화 외국인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화합시킬 기초는 바로 한국 고유의 문화여야만 한다. 외래 ‘선진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한국 사회에서 꽃피우게 하는 것보다 한국의 토착 문화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게 훨씬 타당성 있는 이야기다.

 다문화 사회는 교향곡과 같다. 다양한 문화적 전통이 녹아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면서, 하나의 교향곡 안에는 독특한 화음이 각각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체로 위대한 전통을 가질 수 있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세계적 문화로 거듭날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인들은 인간 경험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강조하는 주자학 전통에 뿌리내린 문화를 이어받았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 또한 다양한 인종·문화·전통을 끌어들이는 새로운 문명의 근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전통 문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의 추수감사절 전통은 청교도 혁명 시기에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 ‘필그림’들이 첫 수확을 기념한 행사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오늘날 추수감사절은 흑인, 중국인 등 다양한 민족들과 모든 미국인들이 참여하는 문화가 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비록 200여 명의 노예를 소유한 백인 농장주였으나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인권을 설파해 헌법 제정의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제퍼슨은 백인 남성의 권리만을 염두에 두었으나 오늘날 그의 계몽 철학은 다양한 민족과 배경을 가진 모든 미국인들이 삶의 근간으로 삼는 철학이 되었다.

 미래에는 아프리카계 한국인, 베트남계 한국인 등 다양한 한국인들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고유 문화를 고이 간직하면서도 한국의 문화 전통에도 깊은 소속감을 느끼며 사는 그들의 미래를 그려본 적이 있는가.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 낯선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종대왕이나 원효대사 같은 위인들이 한국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러 민족 출신의 학생에게 존경받는 영웅이 될 수 있다.

 다문화 사회를 지향한다면 우선 북한 동포들과 함께 한반도 문화의 르네상스기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북한과 남한의 시민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역사를 공유한다. 통일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역시 군사나 경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확장시켜 모든 국민이 스스로 그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문화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감동시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문화를 확산시켜 북한 사람과 외국 출신 한국인, 그리고 자유와 문명을 갈망하는 지구의 모든 사람에게 영감과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