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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평일 오전, 유모차 끌고 백화점 가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시나브로 맞은 고은양 탄생 백일. 대여업체 도움 받아 준비한 럭셔리(?)한 백일상에 기분 좋은 고은양.

고립감.

직장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이 땅의 아버지들이 은퇴 후 느끼는 가장 힘든 감정이라고 합니다.

은퇴를 한 건 아니지만, 직장을 떠나 있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도 비슷합니다.

제발 그만 좀 왔으면 싶던 전화는 하루에 한 번 울릴까 싶을 정도입니다(아, 아직도 제가 일하는 줄 알고 전화하는 좀 ‘늦은’ 홍보맨들과 스팸 전화를 빼고는 말입니다 ㅠ).

그런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해 제가 요즘 제일 열심히 하는 ‘사회활동’이 조리원 밴드(네이버의 SNS)입니다.

출산 전엔 애를 낳은 친구가 조리원 동기 모임을 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참 세상에 별 걸 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을, 같은 시기 같은 조리원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진다는 게 조금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요즘 자녀 네트워크의 진정한 시작은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도 아니라 조리원이라는 기사를 보곤 속으로 혀를 끌끌 차기도 했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애를 조리원 때부터 관리하나 싶어서요.

그러던 제가, 지금은 조리원 밴드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위안이 되더군요.

외사촌 오빠(5살)의 태클에도 두 턱 지게 웃으며 찰칵.

온라인으로만 보다가 드디어, 지난 화요일에 조리원 동기 모임을 했습니다. 오프라인의 첫 만남.

어느 조직에나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밴드에서는 애 둘을 낳은, 베테랑 엄마 포스가 물씬 풍기는 93학번 왕언니의 주도로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조리원이 목동에 있었던지라 장소는 목동 현대백화점 카페로 정해졌습니다.

고은이와 대중교통을 타고 아빠 없이 하는 첫 외출이었습니다. 고은양도 긴장한 탓인지 외출 직전에 응가 한 판 크게 하더군요. 덕분에 10분을 넘겨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 평일 오전 백화점의 풍경이란...

카페 안은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로 그득했습니다. 바깥쪽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엄마들 무리는 제게 “혹시 *** 엄마 아니세요” 라고 묻더군요. 저를 다른 엄마로 착각한 거겠죠.

제 조리원 동기 모임은 규모가 더 컸습니다. 엄마들만 8명이나 됐습니다. 결국 그 카페 자리가 부족해 다른 카페로 옮겨야 했습니다. 늦게 온 엄마들을 포함하면 거의 20명에 가까운 대규모 모임이었습니다.

엄마와 첫 외출,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머리에 핀 꼽은 고은양.

옮긴 카페 안의 풍경은 더 생경했습니다.

족히 70명은 앉을 수 있는 카페 안의 자리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아줌마(?)였습니다. 우리 모임처럼 아이를 동반한 모임도 2~3개 팀은 되는 듯했고요.

‘신세계’였습니다.

전에 짐작으로만 ‘진정한 부의 상징은 샤넬백이 아니라 평일 오전 유모차를 끌고 백화점에 오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목격뿐만 아니라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저도 그 ‘평일 오전 유모차 끌고 백화점 오는 유부녀’ 대열에 들어서게 된 거죠.

유모차를 끌고 온다는 건 유부녀라는 것, 평일 오전 백화점에 온다는 건 일을 안 해도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일에 찌들어 당장 그만두고 싶어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견딘다, 하던 시절엔 ‘평일 오전 유모차 끌고 백화점 오는 여자’가 마냥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란 여자가 ‘그런 여자’가 되고 보니, 덮어놓고 부러워할 건 아니더군요.

평일 오전 유모차 끌고 백화점에 모인 여자들은 모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엄마들이었던 겁니다. 직장에서 소속감을 찾는 게 아니라 육아에서 의미를 찾는.

육아에 지쳐 숨통 트이려고 외출했던 그녀들에게, 비아냥 섞인 부러움을 보냈던 과거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고은양은 엄마에게 이렇게 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네요.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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