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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산유의 청신호…유공충화석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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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중의 화제는 영일만일대의 석유개발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는 하룻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배후에는 온갖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파이어니어」들의 피눈물의 투쟁사가 아롱져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영일만유전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간난의 역경을 더듬어본다.【사회부 신종수·이용우·정순육기자】
1959년7월. 33세의 청년실업가 정성엽(엽)씨 (50·영일군의창읍칠포동출신)는 부산용두산 공원에서 부산항을 내려다보며『석탄이나 철광을 개발, 수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오징어·콩·팥·버섯·오리알등을 해외에 수출하는 무역회사 아륭산업 부산지점장이던 정씨는 무역선에 실려 들어오는 철근값이 자기회사가 수출하던 농산물값보다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알게된 뒤 분량만 많고 몇푼 안되는 농산물을 다른 비싼품목으로 변경하고 싶었던 것.

<논갈이 흙에 5색빛>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에게 어렸을 때 추억이 되살아났다. 고향인 경북영일군일대에 널려있는「검은돌」이 혹시「에너지」자원의 중요 몫을 하는 력청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석탄광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매주 토요일 오후만 되면 도시락을 싸들고 영일군의창읍·청하면·대송면의 야산을 답사했다.
그러나 10여차례「검은돌」을 수집, 동생 대영씨(40)를 시켜 부산시청등 알만한 곳에 감정을 의뢰했으나 력청탄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혹시나…』하는 생각에 동생과 함께 석탄광 탐사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몇년가을) 의창읍칠포동 논가에 지쳐 쉬고 있던 정씨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논을 가는 농부의 쟁기 밑에서 뒤집혀 올라오는 진흙이 햇볕을 받으며 오색찬란한 빛을 발했다. 순간 발밑을 보니 도랑을 따라 흐르는 자연수위에도 무지개 빛 기름이 떠 있었다. 손을 적셔 냄새를 세밀히 맡았다. 희미하지만 분명 석유냄새가 풍겼다.

<책방뒤져 자료수집>
뜻밖의 발견에 놀란 그는 이제까지의 석탄광탐색을 일단 보류하고 논에서 흐르는 석유질분의 정체를 캐기 위해 동생 대영씨와 함께 포항을 중심한 영일군일대를 다시 탐사했다.
그 결과 이 일대에 밤이면 형광무층(형광무층)이 형성되고 의창군칠포동, 청하면이가리, 포항시해도동등 곳곳에서 석유질 기름이 흐르는 것을 알아냈다.
형광무층은 지하의「오일·풀」가장자리에서 석유경질분(경질분)이 삼출(삼출)되면서 지상으로 나와 서기(서기)와 같이 하늘로 오르는 것으로 유전지대에서나 나타나는 현상.
일단 석유질분을 확인한 그는 다음해 이부문의 지식을 넓히기 위해 부산의 책방을 샅샅이 뒤져 석유에 관한 책을 찾았다. 부산에 마땅한 책이 없자 대구까지 출장, 책방을 뒤져 5개월만에「지하자원탐광법」이라는 일본책 1권을 구했다. 이 책은 일본의 저명한 석유지질학자이며「아라비아」석유회사 기술부 차장이던「쓰찌다」(토전정차낭)박사가 지은 석유 및 천연「개스」탐사지침서.

<토전에 화석보내>
그는 이 책을 정독한 뒤「쓰찌다」박사에게 편지를 내 영일·포항지구의 지질을 설명하고 석유에 관한 학문적지도를 요청했다. 두차례의 정씨 편지를 묵살했던「쓰찌다」박사는 세번째의 그의 편지에 학문상의 지도를 해주겠다고 회신해왔다.
그후「쓰찌다」박사는 정씨와 10여차례 편지왕래를 봉해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고『당신이 말하는 모든 자료로 보아 산유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쓰찌다」박사는 그밖에도 자진해서 각종 전문서적을 보내주고 석유탐사의 기술적인 문제까지 친절히 지도, 그를 격려했다.
「쓰찌다」박사의 회신에 힘입은 그는 이무렵 아륭산업을 사직하고 동생 대영씨와 함께 본격적으로 석유탐사에 골몰, 61년2월 청하면용두·이가리 일대의 흑색 혈암(혈암)에서 석유 개발의 청신호와도 같은 소형유공층(유공충)화석20여종을 적출(적출)하는데 성공했다. 정씨는 즉시 유공충화석견본을「쓰찌다」박사에게 보냈다.
「쓰찌다」박사는 이를 감정, 『틀림없는 유공충 화석이다. 더욱 치밀히 조사해 보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광암설정 출원내고>
유공충이란 단세포로서 크기는 1mm에서 큰 것은 10cm짜리 까지있다. 4억년 전부터 현재까지 살고있으며 그 종류만도 1만여종. 몸안에 여러개의 방(방)을 갖고 있으며 맨 끝에 구멍이 뚫려있어 유공충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사동류등 몇 곳에서 일본학자들에 의해 대형유공충화석이 발견된 일이 있으나 그가 발견하 것 같은 소형유공충화석은 처음이었다. 석유는 바다에서 사는 미생물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설에 따라 그가 발견한 소형유공충 화석발견은 이곳이 바로 유전발견의 중요한 지층임을 말해준다.
이 유공충 화석의 발견으로 그는 이 일대가 종전학설이었던 육성층(육성층)이 아니라 해성층(해성층)임을 확인하고 『이곳에 석유가 난다』는 확신을 굳히게 됐다.
그는 이 유공충화석 발견이 자신의「석유에 대한 집념 17년」가운데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며 당시『유공충화석을 들고 덩실덩실 춤추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석유부존(부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유공충화석 발견으로 영일·포항지구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힌 그는 61년 제1지구(용두·죽천)의 광구실정 출원을 당국에 냈다. 겉으로는 석탄을 캔다고 위장했으나 사실은 유공충화석발견을 숨긴 채 현장주변을 맴돌며 지질연구와 화석채취에 열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쓰찌다」박사를 통해 석유지질학에 관한 지식을 넓혀갔다.

<학자들 현지조사>
그러던 중 62년10월 의창에서 사람의 두개골 모양의 화석을 캐냈다. 그는 이 화석을 대구 경북도청에 감정을 부탁, 경북도청은 다시 서울대에 감정을 의뢰, 석회조 화석으로 밝혀진 일이 있었다.
이밖에 그는 이 지역에서 극피동물·선충동물·완족동물화석과 어린화석도 새로 발견했다.
63년 7월에는 의창읍에서 거대한 동물의 척추골로 보이는 화석을 발견했다. 이 사실이 당시「매스컴」에 보도되자 서울대학교 지질학과 정창희교수, 상공부 지질과 엄상호과장, 경북대 지질과 장기홍·원종관교수등이 현지조사를 내려가 감정, 약2천2백만년전의 신생대 제3기 말엽(선신세 또는 중신세)에 살았던 길이 20∼30m의 큰 고래척추골의 후반부 뼈라고 추정했다.

<지질 조사소도 확인>
이러한 일련의 해서(해서)동물의 화석발견으로 이 지역은 분명한 해성층(해성층)임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씨의 이 화석공개는 우리나라 석유개발의 꿈을 한치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정씨가 지질학자들과의 화석을 주제로 한 토론회 도중 지금까지 자기 혼자만 알고있던 소형유공충화석발견 사실을 엄상호 지질과장에게 발설하고 유공충화석을 내보인 것.
유공충 발견사실이 밝혀지자 엄과장은 포항에 출장 중이던 국립지질조사소 직원들을 데리고 즉시 의창읍 일대의 지질조사에 나섰고 정창희교수는 유공충을 감정, 이 지방이「석유가 나올 수 있는 지질 조건을 충분히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학계의 반응도 좋게 나오자 그는 더욱 석유생산의 벅찬 꿈을 굳히고 본격적인 개발을 서두를 결심을 했다. 같은 달 맏형인 정창출씨(55)를 통해 당국에 제2·제3지구에 대한 광구출원수속을 밟았다. 이로써 이 일대 주요지점에 78개의 광구를 설정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감히 땅 밑에 석유가 있더라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검은 노다지」에 대한 꿈은 한없이 부풀어 있었으나 형이나 아래의 3동생에게 이 엄청난 작업을 할 능력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 석유야말로 어느 개인의 치부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고 했다. 캐기만 하면 반만년 역사의 향방을 바꿀만한「에너지」혁명이기에 개인의 사업이전에 국가적 차원에서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 그는 형제들과 이 문제를 협의, 결국 국가의 최고원수에게 석유개발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알리기로 했다.

<64년 정부서 착수>
63년8월 그는 박정희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에게 건의서를 냈다. 정씨는 건의서에서 『중동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다한 국가가 천혜의 석유혜택을 받으면서 경제를 부흥시켜 나가고 있으나 우리나라만 유독「산유불가능」이라는 정설 아닌 정설에 얽매여 있다』고 지적하고『그러나 영일·포항지구는 일련의 과학적 탐색에 의해 지질구조상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많음이 입증되었으니 하루 빨리 우리나라도 이 지역을 국가에서 집중 개발, 산유의 꿈을 이루도록 조치해줄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같은 해 9월 상공부에 대해『건의인과 함께 현장을 공동조사하고 64년도 예산에서 자금을 확보, 우선 국내장비로라도 시추작업을 펴보도록 하라』는 구두지시를 내렸다.
박의장의 지시에 따라 상공부 지질 조사소는 다음해 초 단독으로 포항지질도를 새로 작성하는 등 유전개발의 기초조사에 착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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