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길 얼음판을 건너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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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장안에 첫눈이 소복이 내린 흐뭇한 날 오후였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가지 못할 곳에 보내고 밤과 낮을 눈물로 보내던 그 늙으신 어머니는 오늘 얼마나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저 흰 눈을 바라보고 계실까-주름진 그 얼굴이 꼭 한번보고 싶었다-그 외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이다.

<옆으로 붙어서 걸으세요>
그 집이 어지간히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차를 저 밑에 세우고 걸어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행인의 발길에 흰 눈이 다져져 자동차 바퀴가제대로 굴러서 오르지를 못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오를 때에는 조심만 하면 그런 대로 낙상의 참변를 면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 길을 다시 내려오는 일은 문자 그대로 모험이었다.
도중에 넘어져서 망신은 망신대로 톡톡히 하고 팔 다리는 부러져 고생은 고생대로 톡톡히 하느니보다는 애당초 앉아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상상하여 보라! 옷이 망가지는 것도 아까운 일이지만 이 나이에 미끄럼을 타고 언덕을 내려간대서야 어디 체면이 설 일인가?
그래서 내 동생의 손을 붙잡고 걸어서 내려가기로 결심하였다. 이 사람은 몸무게가 90㎏이나 나가는 터라 듬직해서 의지할 만 하기는 한데 이 사람이 아차 하는 순간에는 내가 그대로 평형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였다.
그의 손을 붙잡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한발 한발이 다 아슬아슬했지만. 그렇게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도중에 어떤 부인이 저쪽에서 올라오면서 되도록 길옆으로 붙어서 걸으라고 귀중한 충고의 한마디를 던져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래서 인생은 살만한 곳이다. 우리를 못 본체 스치고 지나가도 당연하다고 하겠는데, 그 부인은 간곡한 어조로 타이르듯 일러주고 가는 것이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겠지만, 남을 도우려는 마음씨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이리저리 가르면 뭣 남나>
다른 사람이야 죽건 살건, 내 몸만 편하면 그만 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살기 어렵다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래서 인정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여간 그 여인의 충고를 따라서 동생의 손을 힘 주어 잡고 내려온다. 도중에 넘어질 듯 한 고비가 한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무사히 자동차가 기다리는 그곳까지 닿을 수 있었다.
나는 차에 오르면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협력이란 좋은 거야.』
한국 사람 개개인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다 우수하지만, 일단 모이면 극히 무력해지는 것이 특색이라는 평을 우리는 무수히 들어왔다. 참으로 달갑지 않고 부끄러운 평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의 사회보다도 남성의 사회가 더욱 그렇다는 말에도 수긍이 간다.
정당, 사회단체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종교적 집단까지도 그 분열의 양상은 참혹하기 짝이 없다.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소식보다는 깨어져 둘이 되었다는 소문이 몇 배나 더 많은지 모른다. 어찌하여 서로합치지 않고 갈라서게 되는가? 갈라설 수밖에 없는 무슨 이념상의 차이라도 있는가?
자세히 따지고 보면, 대개는 감정문제다. 출신지방이니 출신교니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상이나 이념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 아닌가?
산골에서 났으면 어떻고 바닷가에서 났으면 어떤가? 북에서 왔느니 남에서 왔느니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의식구조나 활동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런 것을 따지고 서로 갈라선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요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이렇게 베어버리고 저렇게 도려낸다면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국민의 총화가 이처럼 긴요한 시국이고 보면 합하여 하나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오랜 고질의 원인을 좀 더 진지하게 파헤치는 노력이 선행돼야만 할 것 같다.

<어린이 교육에서부터 잘못>
예전에 김활란 선생님은 대동단결하지 못하는 우리 국민성의 결합의 큰 원인이, 어린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우리 어머니들에게 있다고 지적하신 일이 있다. 특히 남성인 경우에, 어머니들의 과오가 더욱 심하게 반복된다는 말이다. 딸을 낳으면 실망하고 아들을 낳으면 기뻐하는 어머니, 세상에 제일이 자기 아들이라고 믿고 그렇게 키우니 저만 잘난 줄 알고,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절대로 용납이 안 된다.
그러니 자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같이 협력하자고 머리를 숙일 아량은 전혀 없을 수밖에. 한 사람의 힘보다는 두 사람의 힘을 합친 것이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건만, 알알이 굴러다니니 자연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무서운 경쟁의 마당에서 밀려나기가 일쑤다.
오늘 우리가 앉아서 우리 조상들의 당파심을 비난하고 파쟁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으로 갱생의 길을 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표어를 내걸고, 미국은 2백년의 역사를 훌륭하게 이끌어 왔다. 다 개인주의고. 다 제멋대로 노는 것 같지만 .국가적 위기에는 일치 단결하여 국난을 극복한 것이 미국 역사의 특색이라면 특색이었다.

<서로의 손을 내밀고, 붙들자>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떠한가? 진실로 가파른 언덕길의 얼음 위를 걷는 것과도 같은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내 손을 내밀어 동생의 손을 믿음으로 굳게 잡고. 그 얼음길을 무사히 걸어서 내려온 그 경험은 이 위기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이 될 것만 같다.
서로 손을 내밀고. 서로 손을 붙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민족의 이 고난을 극복해 보자! 【김옥길<이화여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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