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로 우방과 제3세계의 눈총 받는 주 유엔 미 대사 「모이니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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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시오니즘」규탄결의안·한국문제결의안 등으로 11월 한달 동안 소란스러웠던 「유엔」은 「모이니언」미국대사의 거동으로 또 한번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유엔」안에서의 저돌적인 발언으로 제3세계 국가는 물론 우방들로부터 눈총을 받던 「모이니언」대사가 심사가 뒤틀려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모이니언」대사가 사임하겠다는 「체스처」를 흘려 보냈던 것은 자신에 대해 빗발치는 비난을 두고 미국정부 쪽에서 두둔해주기는커녕 뒤에서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판단했던데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모이니언」대사가 공격받은 것은 외교관답지 않게 속사포처럼 내 쏟는 독설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대사로서 「이디·아민」「우간다」대통령을 두고 『인종주의 학살자』라고 공언하는가 하면 반「시오니즘」결의안에 찬성한 나라는 『꼴불견이고 버릇없다』는 식으로 공박했던 게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모이니언」의 이런 두 마디 말만 없었던들 반「시오니즘」결의안은 저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어느 서구외교관이 말할 만큼 제3세계의 반감은 대단했었다.

<「말리크」능가하는 투사>
미국과 순치의 관계에 있는 영국대사가 『「리어」왕이 황야에서 미쳐 헤매는 듯 하다』느니 『「유엔」이 OK목장의 결투장이 아니며 대표들이 총잡이도 아니다』고 빗대어 「모이니언」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그의 발언이 서구대표들도 마땅치 않아 하고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영국대사의 OK목장이니, 총잡이니 하는 비유는 「유엔」의 문제가 「모이니언」의 서부 활극식 우격다짐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을, 빈정댄 것이었다.
「모이니언」대사는 그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좋다고 생각될 때도 가만히 있지 않고 떠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총회가 끝나기 직전에도 「모이니언」대사는 총 회장을 들썩거리며 총회는 부조리가 판치는 극장이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관객들에게 진지한 체 꾸미고있다』고 말했다.
「모이니언」대사는 지난7월 수석대표에 임명된 이후 「유엔」의 투사 「챔피언」이 되었으며 소련의 「야콥·말리크」대사나 중공의 황화와 같은 노련한 투사들을 능가하고있으며 「쿠바」의 「리카르도·알라르콘·케사다」대사나 그에 필적할 만할 뿐이다.
「모이니언」대사는 「유엔」에서의 그의 연기로 초「스타」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에 대한 언급 없이 지낸 날은 거의 없을 정도고 TV시청자들에게 「키신저」국무장관만큼이나 친숙해져 있다.

<가장 도발·직설적인 인물>
모든 계층의 미국인들이 그를 좋아한다. 일부 사람들은 「키신저」장관이 오히려 예외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맨 처음 소련의 「앙골라」개입에 대한 미국의 비난을 심각하게 제기한 사람은 「모이니언」대사이며 그는 소련이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총회에서 이 문제를 거듭 물고 늘어졌었다. 그는 또한 「시온」주의를 인종주의라고 비난한 결의안채택을 「추한」결정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아랍」측의 불쾌감과 「이스라엘」의 만족감을 함께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인권문제에 관해 공산국가와 제3세계의 「선택적인 도덕률」을 비난하자 공산세계와 제3세계는 크게 격분했었다. 「키신저」국무장관의 산발적인 대 제3세계 공박과 「모이니언」대사의 전천후 독설이 국내 정치면에서 표를 많이 얻을 것은 확실하지만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필요 이상의 대결 분위기를 고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학, 한땐 신문기자도>
현 미국의 외교관중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을 만큼 가장 도발적이고 또 직설적인 인물이 「모이니언」이다.
그는 외교관답지 않게 『아니꼬운 소국』『미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등 신중하지 못한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내뱉었다.
「모이니언」대사는 「뉴요크」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신문기자 출신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모이니언」의 어린 시절 어떤 이유에서인지 집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그는 어린시절부터 구두닦이·신문팔이·부두노동 등의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 자라야만 했다.
이렇게 고학으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2차 대전 때 해군에 입대, 47년에 통신장교로 제대했다. 47년 운 좋게도 그는 「런던」대학에서 「플브라이트」장학금으로 유학, 그의 앞날을 개척했다.
유학생활을 마친 그는 잠시신문기자생활을 한후 곧 행정부에서 소수민족에 관한 직책을 맡게되었다.

<『흑인가족』발표 후 명성>
그러나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65년 『혹인 가족』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논문에서 그는 미국내 전 흑인의 25%가 혼 외 출생이고 더우기 흑인여자의 45%는 아직도 정식배우자가 없다고 주장, 흑인이 열등인간이라고 암시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도전적인 성격이 고난에 찼던 성장기의 체험과 그의 소수민족전공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모이니언」은 60년대 「하버드」대학과 행정부를 넘나들면서 주로 소수 민족문제와 도시연구에 전념했다.
71년 인도·「파키스탄」전쟁이후소원해진 미·인 관계개선을 위해 「닉슨」은 「모이니언」을 주인대사에 임명했는데 「모이니언」 대사는 이때 미·인 관계개선을 뚜렷이 진전 시겨 초임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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