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선수 사이 … 두 얼굴의 리디아 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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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고

뉴질랜드 교포인 ‘천재 골프소녀’ 리디아 고(17·한국명 고보경)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이미림(24)을 포옹했다. 23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와일드파이어 골프장에서 벌어진 JTBC 파운더스컵 3라운드가 끝난 후다. 리디아 고는 이날 5언더파를 기록, 중간합계 16언더파로 단독 선두에 올랐다.

 선두로 출발했다가 한 타 차 2위로 밀린 이미림이 리디아 고의 포옹을 가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골프대회에서 대부분의 선수가 경기 후 건성건성 포옹을 하지만 리디아 고는 진심으로, 밝은 표정으로 팔을 벌린다. 그래서 다들 리디아 고를 좋아한다.

 둘은 경기 도중에도 연예인 얘기를 했단다. 두 선수 모두 소지섭을 좋아한다. 이미림이 “소지섭은 내 사람이야”라고 했는데, 리디아 고는 “좋아요. 그럼 우리 둘이 함께 좋아하는 사람이에요”라고 양보를 했다.

 리디아 고는 여전히 덤벙거린다. 어머니 현봉숙씨는 “프로 데뷔전에서와 지난해 캐나다 오픈에서 우승할 때도 휴대전화를 분실했고 올 초엔 지갑도 잃어버렸다”고 했다.

 JTBC 파운더스컵 1라운드에서 리디아 고는 캐디백에 넣어준 간식을 찾지 못해 “엄마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리디아 고는 “코스에서 계속 먹는다. 다른 언니들은 샌드위치 하나 정도 먹는데 나는 주스·과일·에너지바 같은 것들을 계속 먹는다. 안 먹으면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런 천진함은 리디아 고의 절반의 모습일 수도 있다. 상대가 약점을 보일 때 집요하게 흔드는 승부사 기질도 있다. 파 5인 15번 홀. 이미림이 티샷을 왼쪽으로 실수했다. 그러자 리디아 고의 드라이브샷은 평소보다 똑바로 더 멀리 나갔다. 리디아 고는 이전 4개 홀에서 버디 없이 보기 하나만 기록하면서 이미림에게 끌려다니던 터였다.

 이미림이 덤불에서 공을 찾아 드롭을 하는 동안 리디아 고는 두 번째 샷을 먼저 쳤다. 206야드에서 5번 우드를 짧게 잡고 친 샷은 핀 2m 옆에 붙어 이글 찬스가 됐다. 이미림은 보기, 리디아 고는 버디를 했다. 이 홀에서 2타 차가 사라지면서 리디아 고는 공동 선두로 올라왔고 17번 홀에서 단독선두로 치고 나갔다.

 리디아 고는 “상대가 흔들릴 때 내가 잘 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긴 한데 순전히 운”이라면서 “상대 신경 안 쓰고 나만의 경기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겐 냉철한 승부사 기질이 있는 걸로 보인다. 지난 연말 대만에서 열린 스윙잉 스커츠에서도 끌려가던 리디아 고는 선두 유소연이 더블보기를 하자마자 버디를 잡고 전세를 뒤집어 우승했다. 지난해 캐나다 오픈에서 수잔 페테르센을, 2012년 캐나다 오픈에서 신지애를 누르고 우승할 때도 상대 실수 때 버디를 잡아 의욕을 확 꺾어버렸다. 박인비가 조용한 암살자라면 리디아 고는 천진난만한 암살자다.

피닉스=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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