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규제의 추억 손톱 밑 가시 눈엣가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일러스트=강일구]
주철환
PD

모임에서 머리 색깔이 울긋불긋한 청년을 보았다. 이국적(?) 외모에 유창한 한국어. 정체가 궁금하다. 놀랍게도 신입PD란다. 그 순간 아뜩했다. “세상 달라졌구나.” 그 젊은이는 훗날 대한민국 예능을 바꾸는 기수가 된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 이야기다.

 면접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단다. “자넨 좀 다르게 생겼으니까 뭔가 좀 다른 프로를 만들 것 같다.” 다행이다. 그때 그를 안 뽑았더라면 토요일 오후의 다채로운 즐거움은 줄어들지 않았겠는가. 외양에서 ‘예의’보다 ‘창의’를 인정해 준 면접관의 안목과 아량에 ‘경의’를 표한다.

 20년 전 ‘대학가요제’를 연출하며 내건 슬로건은 ‘건강한 시대정신 참신한 실험정신’이었다. 체육관 행사를 캠퍼스로 가져간 첫해였다. “생방인데 괜찮겠어?” 격한 구호(“신성한 대학에 풍악이 웬 말이냐”)를 우려하는 부장에게 응답했다. “오히려 화제가 되지 않을까요?”

아마추어 대학생들의 경연 못지않게 2부 특별공연에도 신경을 쓰다 보니 떠오른 가수가 이름도 특이한 강산에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으로 시작하는 ‘라구요’(제목도 특이하다)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의지를 애잔하게 버무린 명곡이었다.

 운동장에 나타난 강산에는 ‘군복 입은 예수’의 모습이었다. 방송에서 두발단속이 엄격하던 시절이어서 양해를 구했다. “생방 땐 모자를 쓰면 안 될까요?” 어이없어 하는 표정 앞에서 ‘규제’ 집행자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그는 홀연히 사라졌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용기 있는 연예인 목록에 추가했다.

 ‘규제개혁 끝장토론’을 한다기에 사전을 뒤져 본다. “규제:규정에 따라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음.” 문제는 ‘한도’다. “최소한도 이건 막지 말아야죠.” 그래서 다시 찾아본다. “최소한도:일정한 조건에서 더 이상 줄이기 어려운 가장 작은 한도.”

 자(길이를 재는 데 쓰는 도구)로 머리와 치마를 규제받던 세대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울려 퍼지던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의 유래를 안다. 젊은이는 힘껏 도망쳤고 가위를 든 경찰은 사력을 다해 추격했다. 이발소가 아닌 파출소에서 쥐가 파먹은 머리를 툭툭 털며 ‘바보들’은 ‘혐오감 조성’이라는 죄목을 ‘최대한’ 감수해야 했다.

 ‘손톱 밑 가시’와 ‘눈엣가시’는 대체로 오만과 편견의 산물이다. “내 맘 알지?” 하며 타인의 취향을 규제하던 비겁한 PD에게 “난 알아요” 하며 귀걸이를 떼던 온순한 서태지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오늘은 ‘환상 속의 그대’를 들으며 반성해야겠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주철환 PD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