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의 생각의 역습] 인간 뇌 속의 생각 점화 시스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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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호 29면

성냥개비 열 개를 맞닿게 세워놓고 첫 번째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부터 마지막 열 번째 성냥개비까지 순차적으로 점화된다. 맨 처음 접하는 정보로 촉발되는 생각의 점화 역시 마치 성냥개비에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이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다음의 단어를 보자.

‘에이브러햄 링컨.’

이 단어를 보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깡마른 얼굴에 턱수염이 난 백인 남성’의 이미지가 쉽게 떠올랐을 것이다. 또한 ‘노예해방’ ‘남북전쟁’ 그리고 ‘암살’이라는 단어까지 떠올랐을 확률이 높다. 어떤 사람은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문장까지 생각났을 것이며,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도로 위를 질주하는 ‘링컨 콘티넨털 리무진’ 이미지가 스쳐갔을 것이다.

우리의 뇌 속에 특정 대상과 관련된 정보가 많이 저장되어 있을수록 이러한 연상작용은 더욱 풍부해진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뇌 속에서 어떤 이미지나 단어가 떠올랐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점화작용은 당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적이고 순간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점화현상은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 다음의 지시를 따라보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 것.”

당신의 의지대로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았는가? 당신의 뇌가 정상이라면 이는 불가능하다. 당신의 뇌가 ‘코끼리’라는 단어를 접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이미 코끼리를 떠올렸기 때문에 이후의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지시에 따를 수 없다. 충분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생각이란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기보다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에 장착된 생각 점화 시스템으로 인해 우리에게 먼저 제시된 단어가 나중에 제시된 단어의 처리에 영향을 준다. 한 실험연구에서 ‘eat’이란 단어를 본 사람들은 ‘so_p’을 ‘soap(비누)’보다는 ‘soup(수프)’로 인식하는 비율이 높았던 반면, 창피한 행동을 떠올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들은 반대로 ‘soup’보다는 ‘soap’으로 완성하는 비율이 높았다.

‘eat’이라는 단어는 ‘soup’라는 단어와 정합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뇌 속에서 ‘so_p’은 ‘soup’로 쉽게 점화된다. 반대로 누구에게나 창피한 행동은 가급적 지우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에 ‘so_p’은 무의식적으로 ‘soap’으로 점화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벌어지는 점화효과는 단순히 생각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특정 대상에 대한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느 실험연구에서 A그룹에게는 웃는 얼굴사진을 보여주고 B그룹에게는 화난 얼굴사진을 보여주었다. 이후 두 그룹 모두에게 난생처음 보는 낯선 정보(히브리어 단어)를 보여주고 호감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B그룹에서 난생처음 접하는 정보에 대한 호감도가 더 낮게 측정되었다. 화난 얼굴사진으로 점화된 감정이 이후에 들어온 정보에 대한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우리의 뇌는 어떤 정보에 노출되자마자 이미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 중 가장 정합성이 높은 것으로 점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화 과정은 자동적, 즉각적, 확산적,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감정과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동적으로 점화되는 생각에 물들지 않고 평소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선 인지적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평상심은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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