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유통업체에 다니는 황영수(42)씨는 올 초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 직장생활 14년 만에 두 번째 겪는 일이다. 황씨는 “탈·불법을 저질러 재판받는 대기업 오너들을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소신엔 변함이 없다”면서도 “그래도 지금은 (경제 민주화보다) 경제 활성화가 먼저다. 내수가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시 둔산동에 사는 김모(56·자영업)씨는 대기업 옹호론자다. 김씨는 “이제껏 ‘특혜 시비가 있더라도 규제를 풀어 기업이 사업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얘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대기업 입사에서 번번이 낙방하는 둘째 아들(26세)을 보면서 “곳간이 넉넉한 대기업이 (입사) 문을 넓혀주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토로했다.
‘대기업의 바람대로 경제 활성화를 정책 1순위로 옮기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겠다. 규제 고삐도 과감하게 풀어 봐라. 대신 고용·투자를 늘려 달라’-.
이번 중앙일보 여론조사는 대기업에 대한 이 같은 국민 인식을 반영한다. 고용·투자 확대를 전제로 경제 민주화보다 경제 활성화 정책에 동의하겠다는 것이다. 국민 10명 중 5명 이상(56.0%)은 현시점에서 “경기 회복을 위해 정부의 경제 활성화 정책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가장 시급한 대기업 정책 역시 “규제 완화 등을 통한 일자리 창출, 투자 활성화 유도(53.4%)”를 꼽았다.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책 초점을 ‘일자리’에 맞추고 규제 개혁을 외치고 있어 호의적 평가가 나온 것으로 풀이했다. 박 대통령은 최근 “쓸데없는 규제는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사생결단으로 (불필요한 규제와) 붙어야 한다”(12일 무역투자진흥회의) 등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박태일 상무는 “대통령의 절박한 의지에 국민이 대체로 호응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이제는 여기에 추진력을 더해 성과물을 낼 때”라고 말했다.
문제는 중소기업·직장인·자영업자 등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른바 ‘경제 윗목’이다. 정부와 대기업에 ‘양보’를 했으니 이제 그 온기를 느끼게 해달라는 목소리다. 먼저 ‘중소기업 우선’이라는 현 정부의 슬로건에 대해 국민 인식이 부정적이다. 현 정부의 기업 정책이 “대기업 중심”(44.9%)이라는 여론이 “대·중소기업 간 균형”(29.4%), “중소기업 중심”(14.4%)이라는 의견을 앞지른다.
특히 대기업의 채용·투자 규모에 대해 각각 60.1%, 50.6%가 “기대보다 미흡하다”고 응답했다. 실제로 매출 기준 600대 대기업의 지난해 투자 집행액은 125조원으로 당초 예정치(129조7000억원)에 미치지 못했다. 부경대 서창배(경제학) 교수는 “최근 대기업의 연초 대비 실제 투자 집행률은 80~90%대에 그치고 있다”며 “아직은 국민 지지를 받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책무가 된 일자리 창출에서 책임을 외면하면 대기업은 언제든 불신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는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경제 발전에 대기업의 공로가 많았다”는 긍정적인 답변은 49.9%로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2012년 2월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조사 때(69.5%)보다 20%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경제 윗목에서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언제든 대기업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소리 없는 경고인 셈이다. 이번 여론조사는 집전화(310명)와 휴대전화(390명)를 함께 실시했고, 최대 허용 오차범위는 95% 신뢰 수준에서 ±3.7%포인트였다.
이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