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궁과의 회담서 나타난 김일성 발언의 표리(중)-땅굴은 「9·25교시」따라 굴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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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 김일성은 일본 자민당의원인 우도궁과의 면담에서 마치 남침의사가 없고, 남한의 공산화도 원치 않고 있으며 오직 평화적 통일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김의 남침 흉계는 최근에 있었던 그의 연설에서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북조선 인민들은 언제나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모든 힘을 다해 적극 지원할 것이다.』(75년1월1일 신년사)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할 것이며,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한국의 통일일 것이다.』(75년4월18일 방송연설)한편 북괴는 지난 69년1월 군·당4기 4차 회의에서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을 결정, 전면전과 국지전을 획책하고 나섰으며, 특히 남북 대화가 시작된 71년 이후에도 군사력의 증강에 혈안이 되어왔다.
더우기 이 기간 중 「게릴라」전 및 국지전의 수행을 위한 북괴의 비정규전 능력은 현저히 증대되어 75년1월 현재 「특수 8군단」은 5개 여단 40개 대대 2만5천 병력으로 늘어났 고, 「경보병 여단」은 11개 여단 88개대 연5만4천여 병력으로 증편되었으며 기타의 「게릴라」병력을 합쳐 총 병력 8만명을 넘는 비정규전 병력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김일성의 「남침의도 부인」은 인지사태의 경험을 원용하여 짧은 기간 안에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결심으로 중공을 방문했던 김일성이 소기의 목적달성이 어려워진 한편, 그의 호전성만 드러나 국제여론이 불리하게 일어나게 되자 이틀 은폐 또는 만회하기 위한 술책으로서 우도궁의 방문을 이용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남북대화 중단에 대한 금일성의 책임 전가는 『남조선 당국이 「2개의 조선」정책으로 분열을 영구화하려고 책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현 당국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민주인사와 대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조국의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①남조선에 있는 자본가의 공장과 외국인 투자 기업체의 국유화 ②남조선에 있는 사유농지의 일체 몰수 ②남조선과 미국·일본간의 협력관계 단절이 선행되어야 한다』(74년4월17일 평양방송에서 인용)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김일성이 『남조선의 민주인사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한 말은 한국 내부를 이간시키려는 술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더우기 『현 당국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한 말은 그의 속셈을 간파 당한 사실을 시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북괴가 땅굴사건을 변명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우도궁과의 면담에서 땅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증대시키기 위한 한국측의 모략인 것처럼 비난하고, 『이러한 음모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반문까지 했다.
남침 땅굴은 지난 7l년9월25일 김일성 자신이 대남 공작책 김중린과 북괴군 부 총참모장 김중린를 불러 속전속결 전법을 지시한 소위 「9·25교시」에 의해 굴착되기 시작했었다.
그때 김은 『남조선을 조속히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하며, 이번 「특수공사」는 75년10월10일 당 창건30돌까지 완성하라』고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세부 계획이 작성됐고 72년5월부터 굴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내외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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