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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노산 이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쿠시나가라><4>>
나는 불타의 열반상 앞에 서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불타야말로 초인간인데, 왜 죽음을 피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불타가 죽은 것은 업으로 생겨난 육신일 따름이요, 진리의 법신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육신의 수명은 죽는 것이 원칙이요, 영원한 법신은 항상 있어 멸함이 없는 것이다.「열반」이란 바로 그것을 이름인 것이다.
「열반」이란 것은 범어의「니르바나」 를 음역한 것이요, 뜻으로는 한문으로 감도, 적위, 원적 등 여러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멸은 생사의 모든 인과를 다 멸함이요, 도는 생사의 탁한 급류속에서 건져냄이요, 원은 온갖 덕을 갖춤이요, 적은 모든 장애가 끝남을 이름이다.
또 열반경14에는 불타가 마지막 일반에 들어간 것을 마치 해가 산너머에 떨어진 것에 비겨 열반산이라고도 했고 지도론에는 불타가팔 정도의 배로써 중생들을 건져 이끌고 안전한 열반주의 언덕에 올려놓았다고도 비겨 말했다.
요컨대 문제의 요점은 생사를 벗어나는 데에 있다. 불타의 가르침은 생사를 뻘흙(이)에 비기기도 했고(구사논)또 생사를 급한 흐름(폭류)에 비기기도 했거니와(무양수경), 바로 그 뻘 흙 속에서, 그 급한 흐름 속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열반의 참뜻일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법당 밖으로 나와 뜰 앞에 있는 사나수 그늘아래 섰었다. 불타가 열반하신 곳이 바로 사나수 아래였던 것이다.
사나수는 본명이 「살라바나」요, 그 뜻은 견고하다, 구원하다는 것이라고 모든 경문이 설명해 주고 있다.
열반경소2에
「불타가 이곳 사나수가 네 쌍으로 여덟 개가 서 있는 속에서 열반했기 때문에 사나쌍수라 또는 사나림이라 한다」고 했으며, 또 「쿠시나가라」성을 한문 경전에 각성이라 번역한 것도 사나수가 쌍으로 선 것을 표시함이라 했지마는 그보다는 이 성의 지현이 삼각형으로 되었기 때문에 각성이라 한다는 지관의 기록이 더 적당할 것이다.
또 열반경 1에는 불타가 열반하던 그 순간 이 사나수림의 빛깔이 흰 학과 같이 변했다 해서 이 사나림을 학림이라 한다고도 적었다.
지금 여기에는 사나수가 네 그루 밖에 없고 또 그것도 키는 높건마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경문에 적힌 대로 사나수를 두 줄로 네 쌍을 심어, 불타가 열반하던 그때와 같이 만들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내 여행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기념으로 주지에게 사나수 나뭇잎 몇 개를 청해서, 즐거이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
거룩한 사나수
큰 잎 작은 잎, 손에 들고
만지고 쓰다듬고
가슴에 그이 지니옴은
부처님 열반의 향기
품고 가자 함이외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번 수만릿길, 불타성지를 순례하며, 찾으려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문득 강추금의 시 한 귀절을 읊어 보았다.
(원시)
아미타불비농한 염념미타나이하
공산설월무인야 맥득상봉시자가
(나는 이것을 번역하여 읽어본다)
아미타불이 귀머거리냐
아무리 외운들 어찌하리요
달 밝은 빈산에 사람 없는 밤
만나보면 그게 바로 나 자신이리.
우리가 찾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기 자신이란, 때묻고, 그을고, 변모된 자기가 아니고, 본 시대로의 면목을 가진 참 자기를 이름인 것이니, 그것이 곧 불타인 것이다.
사람마다 누구나『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음 그것이 곧 불타다. 제 마음은 엉뚱한 데다가 내버려두고, 염불을 천 번하고, 독경을 만번한대도 그것은 한갓 헛수작일 따름이다.
보조국사의 수심결이「마음 설명』이요, 아니 불타의 교법 전체가 필경 따지면 마음 하나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타성지의 감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말없이 갔다가 또 말없이 조용히 돌아왔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인데 부질없이 붓을 놀린 것이 도리어 상함이 되지 않았나 후회스럽기도 하다.
더우기 내가 불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과 깨날음을 갖추지 못했으면서 잔 붓으로 큰 글씨를 본뜨려 했던 것 같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글이 불타의 뜻에 어긋남이 없기를 원할 따름이며, 글 속에 잘못 해설된 것이 있다면, 이 방면 전문연구가들로부터 바로잡아줌이 있기를 바라면서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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