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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다가야」에서(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나는 불타가 성도한 자리라고 일컫는 금강좌 앞에서 발을 떼어, 버선발 그대로 도장 경내를 돌아다녀 보았다..
금강좌 곁에 높이 솟은 「마하보디상가라마」(마가보제승가남)는 한문으로 번역하여 대각사라고도 하고, 대보제사라고도 한다.
이 사원은 인도에 있는 모든 사원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사원이거니와, 높이는 1백70척이요, 맨 밑 부분은 정사각형인데, 한쪽 면이 48척씩이며, 위 부분은 「피라밋」식으로 점점 좁게 올라가다가 끝에 가서는 원추형으로 뾰쪽하게 되어있고, 주변에는 작은 탑들이 돌려 있어 균형을 이루었다.
사원 안에는 서쪽 벽에 「석가무니」의 좌상이 있는데, 불타가 성불하던 당시와 같이 동쪽을 향해서 좌선하는 자세로 앉혀져 있다.
불타 열반 후에 「아쇼카」왕이 이곳을 순례했음은 몰론이요. 그래서 그가 이곳에 이 거대한 사원을 창건했던 것이라고도 하나 그것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요, 그보다는 기원 후 4세기께 「실론」의 「메가반나」왕의 창건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이곳은 모든 나라의 승려들과 불교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되었을 뿐 아니라, 5세기 초에 동진의 법현이 이곳을 순례했으며, 또 유식의 종장인 「다르마팔라」(달마파나=호법)가 이 절에서 유식 30송의 해석을 저술하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한 뒤로부터 이곳은 교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현장이 그의 서역기에, 이곳 도장 안팎에 있는 무수한 유적들과 건축과 불상조각들에 대한 것을 자세히 적어두었거니와, 그 기록을 보면, 그때만 해도 여기가 과연 성관이었던 줄을 짐작하기에 족하고, 또 그 뒤 12, 13세기에 와서도 「버마」의 불교도들이 이곳 대 탑을 수보하기까지 했지마는, 마침내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들에 의해서 황폐해지고 말았었다.
그랬다가 서기 1881년에 영국인경제사학가 「윌리엄·커닝엄」(1849∼1919)이 「벵골」정청의 위촉으로 이곳에 있는 대 탑을 발굴 수복했으며, 또 도장 전체가 오랫동안 「힌두」교도들의 소유로 있었던 것이나, 1953년에 이르러, 불교의 성지는 불교도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하여, 마침내 이곳이 불교도들의 손에 귀속케 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사원 뜰을 이곳 저곳 거닐며, 2천년을 내려오면서,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진 역대 스님네들의 유해를 모신 부도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우리 신라 승려들로서 이곳에 인연을 지었던 분들을 헤어보았다.
신라 승려들로서, 아리야발마와 현조와 혜륜과 혜업 등은 「날란다」사원에 인연을 가진 분들이었고, 이곳 대각사에서는 현격과 현태 등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격은 초연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현조(범명은 반가사말저)와 함께 인도로 건너와, 성적지를 순례하고 이곳 대각사에 이르러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40여세였다. 그리고 현태(또는 현대범)는 범어이름을 「살파신야제파」라 했고, 중국에서는 그를 일절지천이라 불렀는데, 우리 진덕여왕대(서기650년께)에, 중국으로, 「티베트」로 「네팔」을 거쳐, 인도의 여러 군데를 유력하고 이곳 대각사에 와서 오래 머물며 경론을 연구하고 당나라로 다시 간 뒤로는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서역구법고승전(권상)과 해동고승전(권2) 등에 적혀 있음을 본다.
그들이 큰 뜻을 세우고, 신라로부터 몇 만리 먼길을 걸어서, 불타의 성적지를 찾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느껍기 그지없었다.
또 그들이 다녀간 뒤, 저 유명한 혜초 스님도 여기 와서 걸음을 멈추었거니와, 나는 특히 그의 기행 속에 적혀 있는 시 한 구절을 새겨 읊어 보았다.
보제수 멀어도 걱정 없고
녹야원 아득한 들 어찌 하리요
다만 가파르고 험한 길이라
뜻 아닌 화가 미칠까 걱정일네
여덟 개의 탑들을 보기 어려움
몇 차례나 큰불 겪어 타버린 때문
어찌타 내소원 채워주는고
오늘 아침 여기 와선 눈으로 보네
(원시)
불려보제원 언장녹야요
지수현노험 비의업풍표
팔탑성난견 삼차경겁매
하기인원만 목도재금조

<계속> [노산 이은상] [제자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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