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성도지 부다가야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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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날란다」의 폐허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들어가는 첫머리에는 벽만 남아 있는 작은 방들이 많은데, 그것은 물론 교수와 학생들이 기거하던 곳으로서, 벽돌로 만든 침상 같은 것도 있었다.
또 왼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작은 석탑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위에 사원의 유적이 있고, 벽마다 불상과 당시의 풍속을 새긴 조각들과 벽돌로 쌓은 난로와 벽화들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른 편에는 넓은 지역에 사원과 「홀」이 있었던 유적이 남았는데, 그 규모의 광대함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거니와, 일찍 7세기 초엽에 여기 와서 유학했던 당나라 승려 현장은 당시의 이곳 실경을 그의 서역기에 상세히 적어둔 것이 있다.
그는 「날란다」의 찬란한 탑들과 사원과 승방들과 뜰 아래 있는 맑은 연못과 그 언저리에 피어 있는 진홍색 「카나크」 꽃과 교수 학생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기록해 놓았음을 본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 「날란다」 폐허에 서서 생각할만한 사람들은 결코 인도 출신의 인물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보다는 멀리 몇 만리를 찾아와 유학하고 수도하던 외국 인물들, 말하면 중국의 고승들과 우리 신라의 승려들을 더 귀하게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당나라 때 현장이란 이는 (602∼664), 속성이 진씨요, 중국 하남성 낙주 사람인데, 28세에 출가하여 28세 때에 국경을 벗어나 고창국·귀자국들을 거쳐 자령 (총령=파밀 고원)을 넘어 인도로 들어와 이곳 「날란다」에 이르렀었다.
그는 여기 와서 이곳의 최고 장로인 「쉴라바드라」 (계지)에게서 유식의 종지를 받았거니와, 그의 이름은 인도 전역에 높이 들려서, 이곳 사람들로부터 「마하야나데바」(대승천)니, 「목사네바」 (해탈천)니 하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 그 당시 「하르샤」왕 (계일왕)에게서 후대를 받았었고, 그래서 그의 협조로 많은 경전과 불상을 얻어 가지고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가니, 때에 나이는 44세요, 그 동안 겪었던 인도 견문기를 저술하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대당 서역기」인데 그로부터 9백여년이 지난 뒤 16세기에 와서 명나라 때의 유명한 소설 서유기 (오승은의 작품이라 함)가 그것을 취재하여 쓴 것임을 생각하면 그의 행적과 또 그의 견문기가 민중 속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쳤던가를 짐작하기에 족하다.
그는 본국에 돌아온 뒤로부터 6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무릇 l9년 동안 경전 번역에 전력을 기울여 76부, 1,347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만큼 그의 불교 사상에 끼친 공적이야말로 절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이 같은 경전 번역은 불교의 포교 전도에 거의 결정적인 사업인 것이니, 만일 그 같은 역경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인도의 종교가 다른 나라에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인가.
물론 중국의 역경 사업이 현장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었고 또 그 이후에도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십 (나집)과 진체와 현장과 불공 등 네분을 역경의 사천왕이라고 높이 일컫기도 하지마는 실상 나십은 서역의 귀자국 사람으로서 본명이 「쿠마라지바」 (구마나기파)였고 진체는 서인도 사람으로서 본명이 「파라마르타」 (파나말타)였으며, 불공은 석난도 사람으로서 본명이 「아마가바즈라」 (아목거발절나)였던 만큼 모두다 인도 쪽에서 온 이들인데 현장만은 중국인인 점에 특색이 있었던 것이다.
또 중국인으로서 인도로 건너가 성지를 순례하고 불경을 연구하고 또 경문과 불상을 싣고 돌아온 이가 현장만이 아니라, 그 이전 이후의 고승들로 법현이니, 말운이니, 의정이니, 자민이니 하는 이들도 헤아릴 수 있지마는 현장의 학문과 업적이 그 누구보다도 두드러진 바 있기 때문에 그를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는 것이다.
뒷날 원나라 세조 때의 석학으로 이름난 경길상 등에 의하여 편찬된 (서기 1287) 대장경 목록 통계를 보면 역경에 힘을 기울인 이의 수가 l94명이요, 또 그들의 손에 의하여 번역된 경전의 수가 1,440부 5,586권에 달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그것은 실로 불교 역사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하여 세계 문화 사상에 특기할만한 가장 빛나는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상하 1천년 동안 계속된 경전 번역의 역사 가운데서도 그 누구보다 현장이 하나의 획기를 지었던 점에서, 우리는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오, 그래서 나도 오늘 이곳 「날란다」 폐허에서 특히 그의 이름을 예찬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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