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탄생지 「룸비니」③|노산 이은상(제자 이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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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룸비니」에는 「마야」부인의 사원이 있다. 그 사원의 법당은 조그마한데 정면 벽에 「마야」부인과 아기 「석가무니」의 그림이 있다.
나는 발길을 돌려 사원 서쪽에 있는 이른바 「아쇼카」(아육왕) 왕의 돌기둥이란 것을 배관했다.
「아쇼카」왕(BC272∼BC232재위)은 불타열반 후 2백 수십년 뒤의 사람으로서, 인도의 역대 재왕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더우기 불교에 귀의하여, 교법의 보호와 홍통에 전력을 기울였던 검에서 말한다면 마치 저 「콘스탄틴」대제가 「로마」제국을 새 기초 위에 올려놓고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하여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어 불멸의 공로를 세운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아쇼카」왕 돌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데바남므리야·프리야·다르신 왕(아육왕)20년에 왕 자신이 여기 와서 예배한 것은 「불타 석가무니」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왕은 여기에 돌기둥을 세웠으니, 이것은 성인이 탄생하신 곳임을 표해두기 위함이다.
그리고 왕은 「룸비니」마을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또 생산물은 8분의1만 공납하도록 특전을 베풀었었다.』(「네팔」정부간행 「룸비니」소개서)
이 같이 제왕의 힘으로 높이 떠받들었던 「룸비니」화원도, 세월 따라 어느결엔지 황폐해져서, 「아소카」왕 시대로부터 I천년이 지난, 우리 신라 혜초 스님이 이곳을 순례했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는 이곳 「룸비니」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부처가 태어나신 곳에는 지금 무수우가 서 있음을 본다. 성은 이미 허물어졌고, 탑은 있으나 중도 없고, 백성들도 살지 않는다. 이성에는 나무숲이 거칠고 우거져, 길에는 도둑이 많아, 예배하러 가는 이들이 무척 어렵게 여긴다.
이 같은 기록을 남긴 혜초 스님은 신라 성덕 왕 때의 승려로서, 일찍 청년 시절에 당나라로 건너가 남인도 밀교 승려인 금강지와 부공삼장의 제자로 있다가 문득 생각한바있어 남해로부터 인도로 들어가 당시의 오천축 땅을 두루 밟고, 다시 용령(지금 「파미르」고원)이북의 여러 나라까지 살펴보고 당 현종 개원15년(신라 성덕왕26년, 서기727)에 당나라 안서로 돌아왔다가, 뒤에 장안에서 최후를 마친 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왕오천축국전』3권을 지어, 자기가 보고 다닌 견문기를 적었었는데, 그것이 어느 샌지 없어졌더니, 1910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벨리오」의 손에 의해서, 중국 돈황 오묘산 천불동 석굴 속에서 남은 조각이나마 발견되어, 세계의 보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인도견문기로는, 혜초보다 암서, 법영의 『불국기』와 현장의 『서역기』와, 의정의 『남해기귀전』등이 있지마는, 혜초의 것은 그들 이후의 기록인 점에서 학계의 연구자료가 되어 있는 것이다. 「아쇼카」왕 시대로부터 혜초 스님 때까지 1천년이 지났듯이, 혜초 스님 때로부터 오늘까지 또 l천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룸비니」는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어버려진 곳이 되었더니, 서기 1895년에 이르러 독일의 고고학자 「A·A·퓌레트」박사가 「아쇼카」왕 돌기둥을 발견하여 이곳이 불타의 탄생지임을 밝혀내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석양을 거닐면서 「아쇼카」왕과 혜초 스님을 생각하고 노래 두어 장을 읊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거룩한 이 나신 곳을
모래바람 덮씌워서
꽃동산 거칠어지고
너른 벌 길조차 묻혀
몇 세월을 보내던고.
여기가 어딘가요
달려온 이 누구시요
「아쇼카」왕 기쁨에 넘쳐
돌기둥 높이 세우고서
부처님 나신 곳이라
손수 새기 옵더니.
여기가 어딘가요
들 가에 해가 저무네
모래 언덕 거닐며
생각나는 이 있다.
옛날 혜초 스님이 밤을 어디서 드새던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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