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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줄 쥔 정부, 정원 감축만 신경 … 부실대학 연명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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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올해부터 모든 대학 재정지원사업에 정원 감축 여부를 연계하기로 했다. 대학 구조 개혁과 특성화를 유도한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생력을 잃은 대학에 산소마스크를 씌워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경북 경산시 대경대 실습실에서 김상태 교수가 호텔조리학부 학생에게 조리법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이 요리한 음식은 외부 방문객과 교직원을 위한 학교식당 ‘42번가 레스토랑’으로 공급된다. 호텔매니지먼트학과 학생들은 이 레스토랑 운영과 서비스를 맡는다. 취업특성화대학인 대경대는 학생 전공에 따라 베이커리·와이너리·뷰티살롱·향수체험관 등을 직접 운영, 현장 감각을 키우게 한다. 대구시와 함께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사진 대경대]

대전에 있는 4년제 사립 배재대는 지난해 11월 교수 8명으로 전략기획단을 꾸렸다. ‘지방대 특성화사업’ 지원대상에 선정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위해서다. 교육부가 70개 교 정도에 2031억원을 나눠주는 사업인데 다음 달까지 사업계획서를 내야 한다. 김홍석 기획처장은 “30억원만 받아도 학생 300~400명 등록금에 해당하는 데다 학교 평판도 걸려 있어 지방 사립대로선 사활을 걸어야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기획처 직원 김모(35)씨는 최근 두 달 동안 원래 사무실이 아닌 회의실로 출근했다. 교수·단과대 직원 등 10여 명과 지난 4일 마감된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신청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지난달부턴 매일 자정까지 야근을 했고 휴일도 반납했다. 이 대학은 ‘수도권 대학 특성화사업’ 대비팀도 따로 운영 중이다. 역시 교수·직원 10여 명이 매달려 있다.

 국내 대학들이 ‘전(錢)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정부 재정지원금을 따내려고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것이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정부가 대학에 주는 지원금은 413개 사업에 9조7000억원(2012년 기준·전문대 포함)에 달한다. 교육부가 올해 시행하는 굵직한 사업만도 즐비하다. 이미 마감한 LINC 육성사업(총 지원금 2388억원)에 이어 3~4월 중 접수하는 지방대 특성화사업, 수도권 대학 특성화사업(546억원), 특성화 전문대학 육성사업(2696억원) 등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다.

사업 탈락 땐 신입생 유치 직격탄

 대학들이 이런 사업을 따내려고 기를 쓰는 것은 돈도 필요하지만 낙인(烙印) 효과도 걱정돼서다. 경북 동양대 이재철 기획처장은 “4년간 등록금을 올리지 못했는데 정부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받으려면 교수 확보율을 75% 이상으로 맞춰야 해 재정 압박이 심해졌다”며 “학생 수 급감에 따라 농어촌 사립대부터 위기를 맞을 텐데 생존을 위해선 재정지원사업을 부지런히 따오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충북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돈도 돈이지만 사업에서 떨어지면 인근 대학에 비해 안 좋은 곳으로 낙인찍혀 신입생 유치에 직격탄을 맞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돈줄을 쥐고 정책을 펴는 교육부가 올해부터 모든 재정지원사업에 대학별 정원 감축 계획을 연계하기로 하자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교육부는 각종 평가지표에 가점을 주는 방식으로 정원 감축 여부를 반영하기로 했는데, 올 하반기부터 시행할 계획인 구조개혁 평가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대학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재정지원사업을 고리로 모든 대학의 정원을 줄이는 데만 초점을 둬 대학 경쟁력이 높아질지 의문”이라는 반응이다. 지방 국립대의 한 교수는 “적정한 대학 수와 대학생 규모, 직업 시장에서 대졸자 수요 등을 고려해 대학 구조조정 방향을 정해야 하는데 현재 교육부의 계획은 대학을 평가해 등급별로 정원만 줄이자는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부실대학에 산소마스크를 씌어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구조개혁 평가에서 두 차례 연속 최하위 등급에 포함되면 강제 퇴출시킨다는 계획이지만 평가 주기가 길고 해당 대학 수도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돼 부실대학 퇴출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대학 특성화를 제대로 달성할지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전북 원광보건대(전문대)는 올해 26개 학과를 22개로 줄이면서 전체 학과를 보건·의료·식품 분야로 특화했다. 기존 관광학과는 의료관광학과로, 한류학과는 힐링·테라피학과로 개편했다. 하지만 정원 감축 여부와 연계한 교육부의 특성화 사업으로는 대학들에 이런 변화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 정책, 부실대학에 산소마스크"

 경북 지역의 한 전문대 총장은 “재정지원사업에 선정되기 위해 어떻게 특성화를 할지보다 다른 대학이 정원을 얼마나 줄이겠다고 할지 눈치를 보는 대학이 많다”며 “우리 대학은 정원을 절반까지도 줄일 수 있다는 태도로 과감하게 감축 계획을 짜라고 실무자들에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4년제대 총장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도 지난달 6일 총회에서 “정원 감축이 필요하지만 정부는 대학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대학의 교육 내실화 노력을 지원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문을 발표했다.

 대학 관계자들이 특성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실제 지방대가 처한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남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 재정지원 사업 대비 태스크포스팀을 5개나 가동하고 있지만 솔직히 지역산업이랄 게 없어 고민”이라며 “지역에서 경쟁하는 서너 개 대학이 모두 비슷한 특성화 주제를 내놓기 일쑤”라고 말했다.

"산업 기반 없는데 계획서만 그럴듯"

그는 “비빌 언덕도 없는 곳이 대부분인데 사업계획서만 그럴듯하게 써 낸다고 특성화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정부가 지역별로 향후 어떤 산업을 육성할 것인지, 대졸자들의 취업이 어떤 분야에서 가능할 것인지 등을 함께 고민해줘야 하는데 돈은 줄 테니 대학들이 알아서 짜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세종대 신구 총장은 대교협 총회에서 “일률적으로 정원을 감축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교육부의 구조개혁 평가지표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만큼 대학협의체가 지표를 개발한 뒤 교육부와 상의해 최종 결정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특별취재팀=김성탁·천인성·윤석만·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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