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가스관 잠글라 … 러시아 제재 머뭇대는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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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코비치 파병 요청 편지" 러시아의 비탈리 추르킨 유엔대사는 3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축출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라며 편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편지에는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뉴욕 로이터=뉴스1]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점령이라는 우크라이나발 화마(火魔)가 유럽연합(EU) 앞마당에 번지고 있다. 소방수로 호출된 미국은 불 지른 러시아에 “경제와 외교적 제재방안 검토”(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3일 기자회견)로 응수했다. 방화범을 벌하고 화재를 진압하기에 다소 부족한 조치다. 그런데 그마저도 실행이 쉽지 않아 보인다. 소방호스를 함께 끌어야 할 유럽의 반응이 미온적이어서다.

 미국의 대러시아 수출 비중은 0.7%에 불과하다. 독일(3.3%)과 비교하면 5분의1에 불과하고 일본(1.6%)보다도 적다. 대러 경제제재 약발이 먹히려면 EU 국가들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하지만 3일 열린 EU 긴급 외무장관 회의에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은 무역 제재에 반대 뜻을 보였다. 독일은 러시아를 G8(주요 8개국) 모임에서 퇴출시키자는 미국의 제안도 거부했다. 러시아와 비자 자유화와 경제협력 협상을 중단하는 방안 정도만 합의됐을 뿐이다.

 유럽은 괜히 러시아를 자극했다가 더 큰 화를 부를까 걱정한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이 쓴 천연가스의 30%가 러시아산이었다. 만약 강대강 대립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져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끊기기라도 하면 유럽인들은 추위에 떨고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 천연가스가 난방과 취사에 주로 쓰여서다. 발전도 타격 받는다. 지난해 유럽의 전력량 가운데 11%가 천연가스를 태워서 만들어낸 것이다. 블룸버그는 “이달 2일 현재 유럽의 천연가스 재고는 45일 분에 불과하다”고 4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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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는 나라별로 조금씩 다르다. 이 가운데 독일은 천연가스 42%, 석유 35%가량을 러시아에 의존한다. 유럽 평균을 훨씬 웃돈다. 독일이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정학적 이유도 있다. 독일과 우크라이나 국경 간 거리는 시카고~뉴욕에 해당하는 약 1200㎞에 불과하다. 독일의 한 외교관은 이와 관련, 로이터통신에 “미국은 멀리 있다”는 말로 입장 차를 요약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직접 타격을 받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독일이란 뜻이다.

 독일에는 러시아 시민권자 20만 명뿐 아니라 소련 출신 이민자 250만 명이 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1980년대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시절 드레스덴에서 5년간 살았다. 게다가 독일은 냉전시대 분단의 경험을 한 최대 피해자다. 서방과 러시아 간의 ‘신냉전’을 꺼릴 수밖에 없다.

 제재에 소극적인 건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우크라이나 투자국 5위에 올라 있다. 런던시티 금융권에는 러시아 자본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이 4일 포착해 촬영한 정부 회의용 기밀 서류에는 “당분간 무역 제재나 대러시아 금융기관 폐쇄안을 지지하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다. 영국 의회는 지난해 8월 시리아 사태 때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군사개입 참여 동의안을 부결시킨 바 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편이다. 최근에 미국을 국빈 방문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시리아·이란 문제 때도 미국의 가장 적극적인 파트너로 활약했다. 하지만 올랑드의 내정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고강도 경제제재에 금융·기업인들이 따라줄지 의문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지적했다.

 미국의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4일 ‘오바마의 가장 힘든 과제는 연합전선’이라는 기사에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이란의 경우처럼 수년간 단일하게 이어지기 힘든 현실을 지적했다.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데다 러시아 경제가 수년간 서방 사회에 깊숙이 얽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첫째 과제는 푸틴에 대한 외교·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게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유엔 대사를 역임한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의 진단이다. 이제 공은 6일 열리는 EU 정상회의로 넘어 갔다.

강남규·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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