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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지역균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크메르의 적화와 월남의 실함 위기를 고비로 동남「아시아」엔 또 하나의 전환기가 찾아 들고 있다. 전후4반세기 동안 이 지역의 안전보장을 지탱했던 미국과의 동맹체제가 급속히 퇴색하는 대신, 동남아는 급격한「하노이」공산권의 득세와 소-중 공세의 침윤에 직면해 조급하게 자신의 국가이익과 안전을 보강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조짐들은 최근「아시아」각국 지도자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표면화되곤 하였다.
미국과의 방위조약을 파기하고 미군기지를 철거시킬 수도 있다고 시사한「마르코스」필리핀 대통령의 말, 2만5천명의 미군과 3백50대의 미 공군기를 연내에 철수시키고「하노이」·북경 파의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한「쿠크리트」태국수상의 연설,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동남아 중립화 안을 제기한 라자크 말레이시아 수상의 구상 등은 모두가 똑같은 불안과 당 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지사태를 보고서『미국은 환자에게 마지막 위급한 고비에서 약을 주지 않고 달아났다』는 것이 이들 나라들의 한결같은 대미이탈논의 북경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인지사태의 비극적 종언이 명백해진 뒤, 여타 우방들에는 계속해서「축」을 주겠다고 약속한「포드」대통령의 언약에 대해서도「마르코스」대통령의 말을 빌자면『그러한 공약이 의회나 유권자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어쨌든 이래서 지금 동남아는 미국의「포스트·베트남」전략망의 바깥쪽으로 뛰쳐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일본·미크로네시아·대양주를 잇는 미국의 선택적 지원대상에서 동남아는 분명히 빠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아세안」국가들이 암중 모색의 과정에서「하노이」·북경·「프놈펜」에 대해 관계개선을 고려하고 중립과 공존을 추구하는 데엔 그만한「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동남아 우경국가들의 중립적인 존립이란 그리 수월한 전망만은 아니다. 국내적으로는 친「하노이」·친 북경의「게릴라」들이 갑자기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데다, 대외적으로도 「하노이」·북경·「모스크바」의 입김이 경쟁적으로 침투해 들어와 복잡한 난맥상을 전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명실공히「인도차이나」공산혁명의 주축으로 등장해 여타 동남아지역의「게릴라」들에게 반체제적「인민전쟁」을 계속하도록 지원할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한편 중공은 강대한 단일「하노이」권의 등장을 꺼려하는 입장에서 아세아국가들의 중립지대화구상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애 대해 소련은「중립 동남아 권」이 자신의 중공 포위망에 연결되도록 미소와 회유를 아끼지 않을 태세다.
미국 역시 동남아의 중립화가「탈 미국 화」를 의미하는 한, 결단코 달 가와 할 처지는 못된다.
이 틈바구니에서 아세아 국가들은「하노이」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중공을 가까이 하든가, 중공 세의 홍수를 막기 위해 소련의 그림자를 끌어들이는 식의 다변적 곡예를 부려야 할지도 모른다.
광활한 상품시장이자 투자지역이며 자원보유국인 동남아는「말라카」해협이 안고 있는 해상전략상의 요충이기도 하다.
이 중요한 지역이 탈 미국 화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자유세계에 불리한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중립화란 전략적 균형과 대국의 합의에 바탕하지 않는 한 지극히 비현실적인 구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중공의 남진을 위한 전략적「중간지대」화나 국내「게릴라」들의 소모전, 또는 소련해군력에 대한 무방비지대로 낙착되기도 쉬운 것이다.
때문에 이들 나라들은 자주와 비동맹을 모색하더라도 그것을 지탱할 만한 자위능력의 확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동남아 각국의 탈 미국 화가 결단코 또 하나의 「인민전쟁」을 유발하는 사태로 빗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미국의 의회가「닉슨·독트린」의 부작용을 직시하여 이 지역의 전략적 균형유지에 충실하기를 촉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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