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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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려 우왕 14년 (1388) 원의 요청으로 명을 치기 위하여 본의 아닌 출진을 하게된 우군 도통사 이성계는 압록강 중류의 위화도에서 회군하기로 작심하였다. 대세는 이미 10만명의 고려 원군으로도 원을 구할 수 없게 기운지 오래다. 그러나 군령을 거역하려면 그럴듯한 명분만은 있어야 했다. 『그렇다. 상국의 경을 범하다니. 「이소 역대」가 될 말인가.』
평양을 거쳐 수도 개경에 이른 이성계는 내친김에 『군 측의 악을 없애고 백성을 편케 하겠다』고 선언하여 우왕과 상사 최영을 몰아 내는 일대 「쿠데다」를 감행하였다. 이로써 신 왕조 창건의 터전은 다져졌지만 이와 함께 우리 민족에게는 「사대」 란 싹이 트게 되었다고 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대」의 망령은 근 6백년 후인 요즈음도 살아 남았는지 국회에서는 간밤에 그 망령을 몰아낸다는 법을 「변칙」 통과 시켰다. 막연히 나마 나쁘다고 들어온 「사대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정견이 없이 세력이 큰 쪽에 붙는 주의」정도로 풀이하였다.
반드시 대외 관계에 쓰이는 말은 아닌 듯도 하다. 식자의 말로는 『춘추좌전』 소공 30년조에 처음으로 보인다던가. 그리고 『맹자』의 『양혜왕편』 엔지는 『지자 만이 능히 「이소 사대」를 한다』는 기상 천외의 구절이 나온다던가. 영어에도 「플렁키즘」 (Flunkyism)이란 말이 있기는 하나 이는 위에 아부하고, 아래에 군림하는 태도인 듯 하다니 「사대」보다도 좀더 불순한 편이다. 이른바 「스노비스트」(Snobbist·속물)가 이런 성격의 소유자라던가.
가만히 생각하니 이성계가 회군하며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는지 여부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그의 결정에는 지자 다운 일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게 「사대」를 낙인으로 찍은 건 일본 식민주의자였다고 한다. 연면불절의 강인한 생명력을 뻔히 보며 함부로 「사대」란 말을 쓰는 것부터가 일제의 잔재라면 어떨지.
야당에서는 『모국애와 국경을 넘은 봉사』란 말을 썼다. 한창 천주교를 탄압하던 순조 1년 (1801) 황사영이란 청년은 북경의 사교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교난의 현상을 알리고 원조를 청하려고 하였다. 그의 행동은 비루한 「사대」였던가, 거룩한 「봉사」였던가. 어지간히 속단키 어려운 문제다. 적안으로 보면 모두가 도둑이요, 불안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라지만 「사대」를 보는 눈도 저마다 다르다.
바로 그 「사대」 입법이 주체성 있는 현대적 「사대」관을 피력할 사이도 없이 수십 초만에 통과되었다. 입법에는 절차가 있다. 그 과정을 흐린데도 필경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행정부에 대한 「시대」에서였는지, 「봉사」에서였는지. 오늘의 「사대」 입법을 보는 눈은 과연 어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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