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21일 vs 3일 … 보험 있고 없고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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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직장인 김지훈(가명·34)씨는 지난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허리 통증 때문이었다. 가입해둔 민영의료보험의 계약 내용을 살펴보니 입원 나흘째부터 보험금이 나온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개인의료보험에 가입한 것이 있느냐”고 물은 뒤 “원하시는 대로 진행해 드리겠다”고 했다. 김씨는 X선을 찍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열흘을 보냈다. 보험사 한 곳으로부터 하루에 5만원, 다른 곳은 하루에 3만원씩 받았다. 김씨는 최근 맹장수술을 받으면서도 병원에서 권하는 5일보다 훨씬 긴 열흘간 입원했다. 김씨는 “어차피 매달 20만원 넘게 보험료를 내는데 이럴 때 본전 생각을 안 할 수 없다”고 했다.

 진단금과 입원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정액형 개인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원이 많은 20개 주요 질환자 중 보험 가입자들은 보통 환자들보다 평균 이틀 이상을 더 병원에 머물렀다. 특히 관절통 환자는 최대 8일 이상 입원을 더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보험개발원은 25일 ‘정액형 개인의료보험 개선방안’을 주제로 하는 공청회를 열고, 숭실대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신기철 교수)에 의뢰한 민영의료보험 가입에 따른 의료이용량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2011년 4~9월 입원 환자가 많은 주요 20개 질환자 81만9000명(59세 이하)을 민영의료보험금 수령자(57만1000명)와 비수령자(24만8000명)로 나눠 병원 이용 실태를 조사했다. 민영의료보험 가입자의 의료쇼핑 경향이 전수조사를 통해 데이터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분석 결과 민영의료보험금을 받은 환자들은 평균 9.93일 입원했다. 보험이 없는 환자들(7.37일)에 비해 2.56일 길었다. 특히 허리디스크와 같은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은 민영보험에 가입했을 때 입원기간이 훌쩍 늘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목이나 허리를 삐끗했다며 장기간 입원하는 ‘나이롱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손가락·발가락 관절 변형, 허리뼈·골반 통증을 호소한 환자들은 보험금 수령자와 비수령자의 입원기간 차이가 각각 8일, 6일 이상 차이가 났다. 허리디스크와 목관절 통증으로 입원한 보험가입자도 5~6일 더 입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장염 같은 가벼운 질환자도 보험가입자가 이틀 가까이 더 오래 입원했다.

 가입한 보험이 많을수록 오래 입원하는 경향도 뚜렷했다. 실손형 보험은 실제 발생한 비용만큼만 보험금을 받지만 정액형은 여러 보험사로부터 제각기 보험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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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디스크 환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입한 보험이 1개일 때는 11.19일, 3개일 때는 19.87일, 5개 이상이면 27.85일로 늘어났다. 비가입자(8.7일)와 비교하면 5개 이상 가입한 환자가 20일 가까이 더 입원한 것이다. 심장 혈관이 좁아지는 협심증 환자는 비가입자(3.31일)와 비교해 5개 이상 가입자의 입원기간(21.5일)이 6배 이상 길었다.

 동네의원과 한방병원 등이 장기입원을 유도하는 모럴 해저드도 확인됐다. 허리디스크로 보험금을 받는 환자라고 하더라도 대학병원에 입원하면 평균 13.39일을 입원한 반면 동네의원에서는 16.91일을 보냈다. 한방병원에서는 같은 질환자의 입원기간이 21.33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정부가 공적 보험과 사적 보험 간의 역할을 정립해 도덕적 해이 소지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국민건강보험 보장률(2012년 기준 62.5%)이 낮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보험가입자 1인당 월 7만~10만원의 보험료를 부담한다. 실손형으로 나이에 따라 1만500~1만5000원, 정액형으로 3만1500~4만5000원가량을 부담한다. 2011년 기준 민영보험사의 전체 보험료 규모(27조4462억원, 농협·체신보험 제외)는 국민건강보험료(32조9221억원) 규모에 육박한다.

 보험료를 내는 만큼 의료혜택을 더 누릴 수 있다면 환자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적정 수준을 벗어나면 국민건강보험 재정뿐 아니라 보험사에 부담이 된다. 이는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진다. 선의의 국민과 가입자들에게 부담이 전가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가 민영의료보험의 보장범위와 관련해 정기적으로 협의해 반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두 부처는 2011년부터 ‘개인의료보험 협의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자율적으로 실태와 의견을 교류하는 수준이다.

 동아대 경제학과 김대환 교수는 “민영의료보험은 보장은 해주는데 (보험사에서) 나가는 돈에 대해 아무도 컨트롤을 안 한다”며 “의료기관과 보험회사가 사전에 협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정부가 비급여의 상당 부분을 관리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숭실대 신기철 교수는 “(보건복지부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민영의료보험의 역할과 보장범위 등을 정기적으로 협의해 자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보험사별로 상품이 달라 가입자들의 선택이 어렵고 과잉 의료 이용이 유도되는 만큼 상품구조를 개편하고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 권순만 보건대학원장은 “정부가 보장성 강화에 나서고 있는 만큼 민간보험사도 계약자에게 과다한 혜택이 돌아가지 않도록 상품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며 “소비자뿐 아니라 공급자의 모럴 해저드 문제도 통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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