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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여당 의원의 경솔한 언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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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6월 열린우리당의 초·재선 소장파 의원 30여 명이 미국의 이라크전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이라크가 알카에다에 협력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미 국민과 동맹국에 제공해 이라크 침공 전쟁을 합리화한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여당 의원들이 집단적으로 동맹국을 비판하면 비상식적”(김덕룡 원내대표), “집권당이 국민을 종잡을 수 없게 하면 옳지 않다”(김형오 사무총장)고 비판했다. 한·미관계에 극히 민감한 발표를 강행한 집권당의 처신을 지적했다.

 최근 새누리당에서 중국을 정서적으로 자극할 수도 있는 ‘선진국’ 논란이 나왔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의혹 사건을 놓고 증거 조작 논란이 불거진 뒤 여야가 공방을 벌이면서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KBS 라디오에서 국정원이 확보한 공무원 유모씨의 북·중 출입경 기록을 놓고 중국 측에서 ‘위조’라고 한 데 대해 “선진국이 안 된 국가들에선 정부기관에서 발행한 문서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발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물론 김 의원은 “꼭 중국이 그렇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고 단서를 달았다.

 야권은 애초 국정원이 입수했다는 문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각에선 중국 측의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갖는다. 국정원의 중국 내 활동을 중국 정부가 견제하려 한다거나, 간첩 혐의를 받던 공무원이 중국 국적자였던 만큼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말이 바뀐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런데 야당이 연일 ‘국정원 조작’을 제기한다고 해서 여당도 맞대응 차원에서 나서다가 ‘선진국’ 얘기를 꺼내거나 물밑 외교에서 다룰 ‘숨은 의도’를 공론화하면 왠지 초라하다. 여당과 야당은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은 정부와 함께 내치와 외치의 공동 책임자다. 야당이 견제와 비판에 몰두한다면 여당은 당장은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앞뒤부터 따지는 게 역할이다.

 증거 조작 논란의 진실은 공개가 됐든. 비공개가 됐든 규명돼야 한다. 동시에 여당은 이게 한·중 관계에서 국익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게 막을 책임이 있다. 새누리당 철학대로 대북 정보력을 확대하고 탈북자 대책이 원활히 이뤄지려면 중국의 암묵적 협조가 필요하다. 정보기관의 휴민트 활동이나 탈북자 송환은 결국 그 나라에서 이뤄진다.

 10년 전 ‘이라크 침공’ 비판 성명이나 이번 ‘선진국’ 표현은 차원이 다르다. 당시는 공식 발표였고 이번엔 의원 개인 차원의 발언이다. 그럼에도 10년 전 한·미 관계를 다루는 집권당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면 이번엔 한·중 관계를 확대하려는 정부와 집권당 간에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이달 중순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은 ‘신뢰’에서 40.6%였고, 민주당은 12.8%였다. 새누리당이 이런 ‘신뢰 경쟁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할 말이 많아도 가리는 게 맞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