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공기마신 산책과 사색과 기도|출감 첫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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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년여만에 자유를 누린 첫 일요일-. 구속에서 풀려난 1백25명은 거의 1년만에 따뜻한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친지에 둘러싸여 첫 밤을 얘기로 지새웠으며 맑은 하늘아래에서 풀려난 감회를 저마다 가졌다.
시인 김지하씨는 15일 밤 옥중에 있을 때 태어난 첫아들 강군을 처음 품에 안고 「아빠」된 기분을 맛본 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내고 일요일 상오4시쯤 집을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고 했다. 삭발한 머리에 닿는 새벽공기는 춥기보다는 상쾌하기조차 해 정릉계곡을 따라나와 모교인 문리대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 동이 텄다. 김씨는 상오10시 명동성당으로 윤형중 신부를 찾아가 뵈었고, 미사에 참석한 뒤 명동거리로 나섰다.
양품점에 들러 7백원짜리 털모자를 사 쓰고 뒷골목을 찾아가 콩비지백반과 즐기던 2홉들이 소주 1병을 비웠다.
얼큰해진 김씨는 또 3∼4시간동안 무작정 걷다가 집으로 돌아갔다가 안암동 성당으로 함세웅 신부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구속3백일만에 풀려난 김동길 교수는 이날 상오4시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2시간동안 보냈다.
일찍부터 밀려든 1백여명의 친지·동료교수·제자들을 맞아 인사를 나눴고 상오11시 누이 김옥길 총장과 함께 이화여대에서 일요예배를 보았다. 오후에는 경기도 시흥군 수암리에 있는 선영을 찾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낙준 박사댁에 들러 인사를 드렸다. 김 교수는 『현재는 직업이 없는 상태로 학교복귀가 어려우면 교도소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껄껄 웃었다.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는 상오11시 일요예배를 주재하고 『그동안 애써주신 교우들에게 감사한다. 옥중의 젊은이들로부터 두려움을 모르는 밝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고 설교했다. 이날 예배에는 나병식군·김정길군(전남대)과 김정준 학장 등 5백여명이 참석했다. 박 목사는 예배를 끝낸 뒤 교회관계자들과 함께 이웃 함흥냉면집에서 조촐한 점심을 들었다.
백기완씨(백범사장연구소장)는 상오6시쯤 깨었다.
이 때는 교도소에서 지긋지긋하게 들려오는 기상나팔소리 때문에 어김없이 일어나는 시간. 백씨는 『양심대로 생활하려는 의지가 꺾이지 않고 이 땅에 정의가 이뤄지기를』 기도했다. 부인 김정숙씨(43)가 정성 들여 차린 아침밥상을 받은 백씨는 목이 메었다. 흰쌀밥·불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몰라 한참 망설였다는 것. 잠깐 외출하려 했으나 딸들이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바람에 눌러앉아 찾아온 친지·친구들과 돼지고기 찌개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나병식군(서울 문리대국사과4년)은 이날 상오5시쯤 일어나 함께 풀려 나온 김정길군과 『교도소 먼지를 닦아내자』며 이웃 목욕탕에 다녀왔다. 밥상을 받아 김치만 자꾸 집어먹으니까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김병곤군(22·서울대상대)은 이날 친구들과 만나 대폿잔을 기울였더니 속이 후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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