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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대의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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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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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는 없다. 송전탑, 4대 강, 해군기지, 세종시, 천안함, 쇠고기….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남긴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어느 것 하나 합의와 승복이 없다. 해결방법이야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사실관계조차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부추긴다. 25일이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 정치권은 아직도 선거 후유증에 시달린다. 민주당은 광화문으로 나갔다.

 우리 사회가 합의된 목표를 잃어버린 탓이다. 합의할 수 있는 절차도 함께 사라졌다. 이전의 방식은 무력해졌지만 새로운 길을 만들지 못했다. 각자 주장은 있어도 공감대는 없다.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 운동이란 이름만으로도 도덕적 존경을 받았다. 가는 길이 달라도 인정했다. 사회적 열망이 있었고,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도덕은 사라지고, 승부만 남았다.

 박 대통령은 그저께 “규제개혁이라 쓰고 일자리 창출이라고 읽는다”라는 구호를 소개했다. 일자리 창출을 강조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임기 중 일자리를 핵심 과제로 삼은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가장 절박한 현안이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큰 합의가 없으면 사사건건 부딪치게 된다. 박정희 시대와는 방향뿐 아니라 절차도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김대중 정부 등장으로 우리는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야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경험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그 이전에는 중요 정보를 집권세력이 독점했다. 심각한 정보 불균형 상태에서 승부는 뻔했다. 야권은 소리 지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 핵심부의 주인이 바뀐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학자나 공무원을 어느 한쪽이 독점하던 시절은 끝났다. 제아무리 길어야 5년 한시 정부다. 전문가나 공무원들이 집권세력의 눈치만 볼 이유는 사라졌다. 주목을 받지 못해 상대적 불이익을 받던 사람에게 정권교체는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사회적 이슈의 배경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나뉘어진 뒤 권위로 찍어 누르던 관행은 끝났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의 권위를 깡그리 부숴버렸다. 검찰의 수사 결과라고 사실로 믿어주지 않았다. 정부기관의 조사 결과라도 의심했다. 심지어 사법부의 판결조차 트위터에 오른 댓글 이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권력기관들이 스스로 구습을 빨리 정리하지 못한 탓도 있다. 평생을 연구한 전문가와 10대가 ‘맞짱’을 뜨는 시대가 돼 버린 것이다.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잡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할 원로들도 힘을 잃었다. 존경심이 사라지고, 편가르기에 휘말려 모욕을 당하기 일쑤다. 권위로만 결론을 내던 시절이 비정상이다. 사실이 존중받고, 열린 토론을 벌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기득권을 붙든 채 무너진 권위에 매달리고, 무조건 반대를 외치며 승리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해답이 없다. 아무리 정상화의 길이라 해도 합의된 규칙이 없이는 가까이 가지 못한다.

 사회 통합의 필요성은 다들 인정한다. 하지만 각자 자기 방식만 내세운다. 중요한 것은 귀를 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새 틀을 짜는 첫 단추는 정치인들의 몫이다.

 대통령과 집권당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옳다고 무조건 밀어붙일 수 없는 시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은 존재 자체가 힘이다. 야당 대표건 의원이건 불러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지원을 얻을 수 있다. 임기 내 원하는 구상을 실현하려면, 그 이상의 설계도를 펼쳐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야당도 대응이 달라야 한다. 집권해보지 못한 때와 다르다. 정권을 넘겨받을 정당이라면 책임이 앞서야 한다. 과거의 관성에 젖은 세력이라면 과감히 털어낼 수 있어야 한다. 눈앞의 승리를 위해 미래를 포기하고, 신뢰를 무너뜨려선 안 된다. 어떤 집단도 ‘집권이 선(善)’일 수는 없다. 왜 집권해야 하는지부터 설득해야 한다.

 여야 중진의원들이 17일 국가미래비전을 논의하는 초당적 기구 구성에 뜻을 모았다. 황우여 새누리당대표와 김한길 민주당대표의 제안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전 정부에서도 ‘미래’를 수없이 논의했다. 그러나 정권과 함께 사라졌다. 이번에도 얼마나 실속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여야가 공감하는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 국가운영의 틀을 새로 짜는 작업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것이 박근혜 시대에 절실한 유신이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