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머스」와 기독교적 복음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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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하기만 했던 올해에도 또다시 「크리스머스」는 찾아왔다.
우리 나라에 들어온 종교 치고서는 가장 나이 어린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명절인 이 「크리스머스」는 이제 온 국민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 하나의 축제휴일로서 어느새 생활습속 속에 수용되고 있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천여년, 유교가 조선조의 국교가 된지 5백년의 역사적 전통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석가탄일이나 공자탄일이 국정공휴일로 제정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견주어 본다면 우리 나라의 일반국민생활에 침투한 기독교의 빠른 동화의 힘은 자못 놀라울만하다고 할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는 그 포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별난 역사적 특수성이 금방 눈에 띈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장기적인 안정을 누려왔던 「유럽」의 교회에는 오랫동안 잊혀지고 있던 피로써 물든 순교를 통해서 이 땅에 그 첫 선을 보였다.
천주교 뒤를 이어 지난 세기 말에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처음부터 중앙의 벼슬아치나 세도가들이 아니라 지방의 두메마을에 사는 천대받는 무학·무력한 상인이나 부녀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펴왔다.
한말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기독교의 선교사들은 참으로 나라를 잃고 살길을 잃은, 이 땅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병든 길 잃은 양들을 위해서 목자 구실을 다 하였다. 기독교는 곧 개화·문명·진보의 복음이었던 것이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의 기독교는 국권을 되찾으려는 많은 애국지사에게 있어 압제자에 대한 저항과 국제적인 연대를 위한 정신적 기둥이 되어 주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것은 그대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도의적인 방파제 구실을 다했었다.
요컨대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자는 구 자유당 치하의 10여년을 제외하면 언제나 치자의 편이 아니라 피치자의 편에서, 권력의 편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서서, 그리고 억압의 합법성이 아니라 저항의 정당성을 설교해왔다.
일반적으로 과거 안정된 시대에 있어서의 종교는 세계의 중심이랄지, 삶의 의미나 가치를 정립하며, 사회의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전통을 강화하는 것을 그 사회적 기능으로 삼아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구 시대의 사회질서가 붕괴하는 전환기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전통에 집착하는 종교는 자신의 보편성과 유효성을 상실해버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 반면, 활력에 넘친 종교는 그 포교에 있어 무너져 가는 현세의 질서유지에 안주하기보다는 오히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보다 깊고 보다 높은 가치나 의미를 터득하여 거기로 길 잃은 양들을 이끌어간다. 유태교에서 기독교가 발전하고 중세「가톨릭」교회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역사적 변동기에 처해 활력 있는 종교는 새로운 변용과 탈피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하나이면서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지면서 하나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종교가 곧 현실사회를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목자를 이끄는 자는 이처럼 현실을 이끄는 자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자에 의해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곧 초월적인 절대자인 것이다.
국내외를 휩쓰는 불황 때문에 예년보다 한결 고요해질 수밖에 없는 거룩한 밤-. 이 밤에 울리는 성탄절의 종소리는 목자가 이끈 길 잃은 양이나, 그 양을 이끄는 목자에게나 다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이 절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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