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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관료·반권력의 직언파|일 수상이 될 「미끼·다께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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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7년 8월 「도오꼬」서 열린 제1차 한·일 각료 회담 때 장기영씨가 이끄는 한국 대표단이 철야 회담을 강행하면서 집요한 경제 협력 교섭을 벌였을 때 당시 「사또」 내각의 통산상으로서 회의에 참석한 「미끼·다께오」씨는 『경제 교섭 같은 것은 각료 회담에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 「아스팍」(「아시아」·태평양 각료 이사회)발족 당시 이를 반공 보루로 삼으려는 한국의 기도에 맞서 「아스팍」은 대결장이 아니라 대화의 장소』라고 주장, 그 내용을 변질시킨 것도「미끼」씨다.
한·일 친선 「무드」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에 할 말은 과감히 하며 비판하고 나선 그 직선적 성격과 각료 회담 및 「아스팍」의 향방을 초기 단계에서 이미 갈파한 장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은 일본 수상으로 확정된 「미끼·다께오」씨의 「알파」이며 「오메가」다.
37년의 정치력을 반권력·반관료로 시종해 온 그의 일관된 반골 행각은 이렇듯 사리에 닿지 않는다고 보면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되건 말건 그대로 좌시치 못하는 그 칼날 같은 성격 탓이다.
자민당 총재와 수상직을 제외하고는 당과 정부의 요직을 거의 빠짐없이 역임했으면서도 이러한 직선적 성격 탓에 반발-대립·충돌-사퇴의 무상한 궤적을 그려 온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변신의 원동력이 된 것이 오랜 정치력에서 길러진 정국의 장래를 직시하는 눈이다.
66년의 「사또」내각 때 외상으로서 「오끼나와」 반환을 교섭할 때 『본토 기준의 반환』을 고집하여 「사또」 수상으로 하여금 『이런 사나이를 외상으로 앉힌 것은 내가 불명한 탓』이라고 개탄케 했다. 이 때의 대립이 발전하여 「미끼」씨는 2년 후에「사또」3선에 반대, 총재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그러나 그후의 「오끼나와」 반환 협정에서 「미끼」 구상이 실현되자 그는 자신의 선견 지명을 곧잘 연설에서 인용하곤 했다. 이러한 통찰력에 바탕을 둔 변신·재기의 되풀이가 그에게 「해바라기 정치인」등의 달갑잖은 「이미지」를 안겨 주기도 했다.
그러나 「미끼」씨는 취미가 없으며 굳이 예를 든다면 자택 정원을 산보하고 붓글씨를 쓰는 정도, 그 흔한 바둑도 「골프」도 않고 지금도 주말이면 자동차로 경제 철학·공해 관계 서적을 싣고 통나무집 별장에 가서 독서에 몰두한다.
일본 안에 GNP 중시 「무드」가 팽배했을 때 그는 이미 GNW(국민 총복지)라는 낮선 용어를 구사하면서 「성장에서 복지로의 전환」을 역설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2가지가 있다. 우정과 자연』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심각한 공해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젊은 의원들에게 『머리가 구식』이라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이렇듯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그는 흔히 이상주의자라 불린다.
이상주의자는 타협을 싫어한다. 이런 점은 한반도 정책에서 대북한 등거리 외교와 한·일간의 현안을 절도 있게 해결하려는 자세로 나타날 가능성이 짙다.
한 전문가는 「미끼」씨의 외교 자세를 가장 닮은 사람이 한국 관계에서 문제 발언을 잇달아 내던진 「기무라」 현 외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미끼」씨가 반 한국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리버럴」한 그의 정치 신조에서 비롯된 것.
그는 자칭 중도파다. 그러나 자민당이 지나치게 우선회 하자 이를 경계코자 좌선회 했듯 한국이 강력한 우경 노선으로 갈 경우에는 반발적으로 좌경할 가능성도 관계자는 예견하고 있다. 「미끼」씨의 파내 수석 참모는 「이데·이찌다로」 중의원. 「미끼」 파내에 「AA연」 「멤버」가 많으나 「미끼」씨 자신은 참석한 일이 없다.
웬만한 일은 직접 간섭을 안 하면 직성이 안 풀릴 정도로 매사에 자신을 갖고 있다. 학생 때부터 웅변을 한 탓인지 여론에 신경을 쓰나 영합하지는 않는 「타입」. 영어를 잘하고 미국에도 친구가 많다.

<자산>73년도 신고 소득액 1천4백22만「엥」
『청렴한 정치인』으로 통하는 「미끼」가 실제로 돈 문제에 어느 정도 깨끗한지 정확치는 않으나 곧 자신의 전 재산을 공개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돈에 얽힌 의혹은 없는 듯.
그의 자산 명세를 보면-.
▲사저=동경부의 고급 주택지인 삽곡구에 있다. 대지 1천54평에 건평8백91평의 목조 2층. 건축비가 7천만「엥」들었다는데 그중 3천5백만「엥」은 은행 융자.
▲번정회관-「미끼」의 사무소로 동경간대전구에 있다. 대지 1천9백80평에 지하l층 지상4층의 「빌딩」. 소유주는 이 「빌딩」관리업체인 간대전 기업이나 「미끼」가 주를 대부분 갖고 있어 실질적인 소유자다.
▲경정택 별장=대지 2천2백44평, 건평 2백44평의 2층 건물. 56년 2백만「엥」에 구입.
▲선거구 사무소=출신구인 덕도시에 있다. 대지 184평의 4층 건물.
▲주식=삼목 사무소 관리 회사인 천대전기업 9천2백주(4백60만「엥」). 사국 방송 1천 2백 36주(액면 5백「엥」).
▲신고소득액-=3년도 1천4백22만「엥」.

<혈맥>정·재계에 인척 많고 처남도 현 중의원
「다나까」의 대명사가 『금맥』이라면 「미끼」는『혈맥』으로 유명하다.
「미끼」는 처가 쪽으로 해서 황족과도 걸리고 「사또」전 수상 등 일본의 정·재계「톱·클라스」의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맺고 있어 일본 제일의 『화려한 일족』으로 불린다.
「미끼」의 가계도를 보면-. 부인 목자여사의 부친은 2차대전전 「모리」 「그룹」의 창시자로 전 소화 전력 사장인 고 삼촉영씨.
그의 장남은 일본 치금 사장이며 전 중의원 의원 삼효. 2남은 역시 중의원을 지냈던 삼청이고 3남은 현 중의원인 삼미수.
「미끼」의 동서인 전 소전사장 안서정부의 며느리의 고모가 바로 황태자비 미지자.
한편 안서정부의 장녀는 전 운수상 대고무부의 며느리고 대고무부의 부인은 「하마구찌」 전 수상의 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안서정부의 형인 안서호(동경와사 회장)의 장녀 가「사또」 전 수상의 2남인 현 참의원 의원 신이의 부인이라 「사또」가 와도 사돈의 팔촌쯤은 된다. 【동경=박동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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