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람 사람] 醬은 땀의 결정… 작품 빚듯 정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요즘도 집 현관에 구두약과 구두 닦는 솔을 놓아두고 아내나 아이들이 출근하는 가장의 구두를 닦아주는 가정이 많다.

웬만한 가정의 상비품이었던 '말표 구두약'을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전 말표산업(옛 태양사)회장 정두화(鄭斗和.84)씨다.

말표 구두약은 鄭씨가 67년 국내 최초로 만든 구두약이다. 지금도 연간 약 2천5백만개가 팔린다. 회사 경영은 현재 鄭씨의 차남이 맡고 있다.

그가 사업이 전성기이던 1970년대 초 51세의 나이로 고향(경기도 양평)에 내려가 지금까지 우리 고유의 전통 간장.된장 맛을 살리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그가 장(醬)을 만들겠다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땅을 일굴 때 고향 사람들조차 이상하게 보았다고 한다. 특히 그가 직접 만든 장 맛이 시원치 않다며 내다버리자 '미친 사람'이란 수군거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2만5천평의 밭에 콩을 재배한다. 매년 11월에 메주를 쑤고, 이듬해 1~2월에 장을 담그고, 4~5월엔 대형 항아리 1백여개에 간장.된장을 뜬다.

이렇게 만든 장을 사려는 이들이 전화주문을 해오면 택배로 보내준다. 최근에는 인터넷 홈페이지 (www.suzinwon.com)도 만들어 장 맛의 중요성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게 됐다.

지난 12일 오전 鄭씨가 운영하는 농장 수진원(修眞園)을 찾았을 때 그는 밭에서 인부들과 함께 흙을 새로 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봄 햇살 아래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서 농사철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쇠스랑을 손에 든 鄭씨는 영락없는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농사일이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엔 구수한 땅냄새 같은 답변이 나왔다. "농사꾼은 날마다 일해야 돼요. 이렇게 일하다 죽는 거죠. 나이가 80이 넘었지만 지금도 새벽 6시에 일어나 농사일을 한다오."

그의 명함에는 '수진원 농장 머슴 정두화'라고 쓰여 있다. "농사에 정성을 다하는 '머슴'으로 살고 싶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장 만들기에 매진하는 것은 전통 장이 우리 식(食)문화의 기본이고, 식탁의 건강을 지켜낼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비료.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돼지.젖소 등 가축을 키워 만든 거름으로 농사를 지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돈을 벌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전통을 지키려는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잖아요. 음식문화는 민족의 정신인데 장 문화가 죽었어요. 일본에는 10년 묵은 간장이 있지만 우리는 3년 묵은 간장도 보기 어렵고요. 아파트 문화가 우리의 장 문화를 죽였다고 봐요."

鄭씨는 "장 맛이 좋으려면 우선 물.햇볕.바람.미생물.꽃가루 등의 조건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며 "33년간 장을 직접 만들었지만 한번도 내 맘에 드는 '작품'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의 농장 장독대에는 9백여개의 항아리가 긴 줄을 이뤄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항아리마다 예외없이 장을 담근 해가 적혀 있다. 예컨대 '4328년간2'의 경우 단기 4328년(1998년) 두 번째 담근 간장이라는 의미다. 그는 간장은 5년, 된장은 2년씩 묵히고 있다.

그의 귀향 이유가 궁금했다.

"서울이 싫었어요. 자고 나면 매일 거짓말을 해야 하는 곳이잖아요. 다들 돈을 벌려고 혈안이 돼있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저 또한 병들어가고 있었죠. 결국 정직하게 사는 방법은 농사짓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에 와서 사람답게 살게 된 셈이죠."

그는 13세 때 할아버지를 따라 양평에서 이틀간 걸어 서울로 왔다고 한다. 돈 한푼 없이 상경한 시골소년에게 세상은 모질고 거칠었다.

20~30대 땐 일을 하느라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었을 정도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고 다 빠진 것도 젊은 시절의 고생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단다.

글=하재식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