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라인 잘 타야 금메달 … 엘리트 체육이 파벌 진원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빅토르 안(29·안현수)은 러시아의 국민영웅이 됐다. 15일 열린 남자 1000m 결승에서 ‘불꽃 질주’를 선보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중국 선수를 앞질러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남자 5000m 계주 예선은 안현수 주연의 ‘러시아 국민 드라마’였다. 우리 선수들은 5000m 계주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을 비롯해 현재까지 ‘노 메달’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빅토르 안에게 직접 축전을 보냈고, 박근혜 대통령은 “안현수의 러시아 귀화가 체육계 부조리 때문이 아니냐”고 질타했다. 안현수는 22일 러시아 사상 첫 쇼트트랙 계주 금메달에 도전한다.

‘에이스 밀어주기’에서 ‘에이스 쫓아내기’로

에이스 안현수가 ‘빅토르 안’이 된 데는 쇼트트랙의 파벌 문제가 가장 컸다. 단순히 미워하고 배척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선수 생활도, 감독 생활도 못하게 막는 경우였다. 현 쇼트트랙 남자대표팀 사령탑인 윤재명 감독은 2005년 선수들과 코치의 반대에 부닥쳐 대표팀 감독을 맡지 못했다. 안현수·최은경 등 대표팀 선수들과 전재수 코치의 목소리가 컸다. 몇 개월 뒤 이번에는 김기훈(1992년 알베르빌,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감독 선임을 반대한다며 다른 선수들이 집단으로 입촌을 거부했다. 안현수·최은경 등 ‘간판 선수’를 제외한 이호석·서호진·이승재 등 대표팀 선수들이었다. “김 코치는 특정 선수를 편애하기 때문에 그 선수가 메달을 따도록 다른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며 “그런 코치 밑에서는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학연보다 무서운 ‘에이스’와 ‘비(非)에이스’ 파벌이었다. 앞서 10년 넘게 감독 직을 맡았던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1991~2002년 국가대표팀 코치·감독)의 수제자 라인(김기훈-안현수)과 그렇지 않은 라인 간의 파벌 싸움이라는 분석이다. 전명규 교수가 감독을 맡던 시절 금메달은 김기훈과 전이경이 휩쓸었다. 이에 대해 ‘한국 쇼트트랙에서는 에이스 밀어주기가 횡행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금메달을 딸 한 명을 위해 다른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의 진로를 막아주는 팀플레이란 것이다. ‘한국체대 출신 vs 비(非)한국체대 출신’ ‘전명규 라인 vs 비(非)전명규 라인’ ‘안현수파 vs 비(非)안현수파’ 등 각종 프레임이 생겨났다. 단순히 속도와 기술만으로 실력을 평가하기 쉽지 않은 쇼트트랙 특성상 선수들 사이에선 “누구 라인을 타야 금메달을 따는 1인이 된다”는 분위기가 퍼졌다.

2006년 토리노 대회는 갈등의 정점이었다. 안현수는 남자 대표팀에서 나와 여자 대표팀 박세우 코치 아래서 지도를 받았다. 대회에서도 안현수는 이호석·서호진 등 다른 선수들과 떨어져 있었다. ‘1인자’ 안현수에게 가려 ‘2인자’로 대회를 마친 이호석은 “1500m에서 안현수에게 금메달을 안겨주기 위해 일부러 추월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후에 안현수는 “금메달이 선수로서 최고 영예인데 양보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다. 결과적으론 이 대회에서 한국이 남자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 3개(안현수1000m·1500m·5000m계주)와 은메달 2개(이호석1000m·1500m), 동메달 하나(안현수500m)라는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 양측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안현수는 소속팀이던 성남시청의 팀 해체를 표면적인 이유로 걸고 2011년 러시아로 떠났다.

회전문식 인사가 계속되고 있는 코치진 선임도 문제다. 현재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을 맡고 있는 최광복 감독 역시 윤재명 감독과 마찬가지로 한 차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2004년 여자 쇼트트랙 선수 구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당시 김소희 코치(현 MBC 쇼트트랙 해설위원)와 함께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는 현재 빙상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준호 전 쇼트트랙 감독은 “현재 빙상연맹은 한국체대파와 비(非)한국체대파가 대립각을 세우며 견제하던 때보다 못하다”며 “연맹에 찍소리도 못하는 사람들만 살아남을 정도로 파벌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태권도-유도, 용인대-한체대-마사회 각축

축구와 야구·농구 등 프로 종목들은 1980~90년대 ’연세대’와 ‘고려대’라는 학벌 라인으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축구의 경우 2000년대 들어 우수한 선수들이 대학이 아닌 프로구단으로 직행하기 시작했고, 이후 축구협회가 사단법인화되면서 감사 대상이 됐다. 회계도 비교적 투명해졌다. 유능한 선수들은 해외에서도 활약했다. 대표팀 선발에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제는 프레임이 바뀌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현대가(家) 라인’이 축구협회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크게 정화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왼쪽)이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한국 스포츠계의 파벌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유도계의 파벌을 주장했던 추성훈. [중앙포토]

‘전통 금밭’인 동시에 비인기인 종목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심각하다. 태권도·유도는 용인대-마사회-한국체대의 3파전이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유도 선수 출신 재일동포 추성훈과 윤동식은 “용인대 선수와 판정까지 가면 항상 패했다”고 주장했었다. 추성훈은 일본 귀화를 택했고, 윤동식도 이종격투기 선수로 전향했다. 태권도계는 지난해 ‘고의 편파 판정’으로 패한 선수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서울시태권도협회는 “오심이었다”며 해당 심판을 제명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지만 판정 조작 뒤에는 뇌물·파벌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펜싱도 마찬가지다. 이모 코치는 2008년 선수를 구타한 사실이 확인돼 영구 제명됐다. 사건이 잠잠해지자 다시 강원도의 한 실업팀에서 코치직을 맡았다. 제명된 지도자는 코치를 맡을 수 없는데도 다시 사령탑이 된 것이다. 영구 제명 이후 이 코치가 대한체육회를 상대로 징계무효소송을 냈는데 대한펜싱협회도 함께 원고로 나섰다. 제 식구 감싸기였다.

명예보다 돈-군면제 따지는 풍토 문제

“(이호석은) 저희들한테 계주 메달 만들어주려고, 후배들 군 면제시켜 주려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 신다운 선수가 14일 대한체육회 SNS에 올린 글의 일부다. 네티즌들이 전날 남자 5000m 계주 종목에서 넘어진 이호석을 비난하자, 후배인 신다운이 “비난을 삼가 달라”며 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호석이 군 면제시켜 주려고 고생했다’는 부분에서 논란은 더 뜨거워졌다. 네티즌들은 “아무리 군 면제 혜택이 있다지만 이를 대놓고 거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국가대표가 아니라 군 면제를 위해 뛰는 선수들 같다”며 또 다른 공세를 시작했다.

해외의 경우 금메달에 대한 보상은 주로 ‘포상금’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금메달리스트에게 미국은 2만5000달러(약 2650만원)를, 호주는 2만 달러(약 2100만원)와 함께 귀국행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안겨줬다. 러시아와 이탈리아는 그보다 조금 더 줬다. 각각 13만5000달러(약 1억4300만원)와 18만2000달러(약 1억 9200만원)를 포상금으로 내걸었다. 중국도 후한 편이다. 베이징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천셰샤에게 중국 정부는 5만5000달러(약 5800만원)를 주는 데 그쳤지만 천의 거주지인 광저우 시에서는 아파트 한 채와 아우디 Q7을 제공했다.

금전적 보상으로 선수의 영광과 명예가 오히려 흐려진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경우 국가 우표에 얼굴을 새겨주는 것으로 모든 보상을 대신한다. 심지어 받은 메달을 기증하거나 팔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80년, 84년 올림픽 10종 경기 금메달리스트인 영국의 댈리 톰슨은 자신의 메달 두 개를 트레이닝 파트너에게 넘겨줬다. 언론 인터뷰에선 “사실 이 메달은 내 트레이닝을 도와준 사람들의 것 아니냐”며 쿨한 면모도 보였다. 물론 유명세를 얻어 광고 및 방송 출연료 등 부수적인 수입이 생기는 건 우리와 마찬가지다.

물론 인도처럼 코치직을 보장하거나 그리스처럼 공무원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창 때인 20대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는 것과는 그 어느 것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국가대표 출신 선수는 “선수들 입장에서는 한창 때 군대에 다녀오면 커리어가 끊기기 때문에 군복무 대신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군복무가 의무인 우리 현실에서 젊은 선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라는 것이다. 실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에이스로 꼽힌 한 선수만 금메달을 따도록 돕는 것은 다른 선수들 입장에선 당연히 내킬 리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 스포츠가 엘리트 체육에만 한정돼 있기 때문에 파벌이 더 심해진 것이라고 분석한다. 정윤수 스포츠문화평론가는 정규 교육과정 대신 운동만 해온 우리 스포츠 교육 현실을 꼬집었다. 각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교장의 실적에 해당 학교 선수의 외부 대회 성적이 반영된다. 자연히 선수들의 정규 교육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운동’이 아니면 할 게 없어진 스포츠 선수들 사이에서 가족주의·폐쇄성이 심해진 것도 당연지사다. 스포츠 ‘파벌’에서 배제되는 것은 곧 한 사람의 생계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 정윤수씨는 “국내 스포츠 선수들은 이미 설국열차 끝 칸에 탄 셈”이라며 “체육계부터가 외부의 어떠한 충격과 탄력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폐쇄적인 집단이 됐다”고 지적했다.

유재연 기자 queen@joongang.co.kr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