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발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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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8세의「하인리히」소년은 엄청난 꿈을 품고 있었다. 매일 저녁 아버지가 읽어 주는「호머」의 서사시『일리아드』를 들으며, 「트로이」전쟁의 유적이 이 지상의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북부의 작은 한 촌에서 그의 아버지는 교회의 목사로 있었다. 「하인리히」소년은 자연히 고대의 역사, 고대의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일리아드』에 나오는「트로이」전쟁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스파르타」의 왕비「헬레네」가「트로이」의 왕자「파리스」에게 유괴 당한다. 이를 탈환하기 위해「그리스」의 10만 군사가「아가멤논」총 대장의 지휘로「트로이」성을 쳐들어간다. 무려 10년 동안의 공격 끝에 이 성은 점령되고 만다. 기원전 1천2백년 전쯤의 일이다.
「하인리히」소년은 혼자 곰곰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쓴 것을 보면 그 전쟁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 모래와 흙을 파면 그 대의 성이 나오겠지!』
그는 무려 40년을 두고 그 발굴에 집착했다. 우선 오랫동안을 두고「라틴어」와 영어를 배웠다. 식료품 가게의 점원을 그만두고 선원 생활을 자원하기도 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가「다다넬즈」해협을 건너「트로이」광대한 평야에 서게 된 것은 1871년10월11일이었다. 이때 48세. 그는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며『여기일 것이다!』라고 혼자 소리질렀다.
그가 40년 동안 품어 온 꿈은 정말 이 평야의 사막 속에서 햇볕을 보게 되었다. 거대한 성벽·대문·황금의 관(2개)·우상들(16개), 그밖에 황금의 보물 8천7백여 점이 발굴되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트로이」를, 그리고「아가멤논」총 대장과 그의 일족들이 묻힌 묘를 발굴했다.
「하인리히·쉴리만」(Heinrich Schliemann)이 죽고 나서 학자들은 그가 못다 한 일들을 보다 깊게 연구했다. 「로마」시대의 고대도시와 그 청동 문화는 이렇게 해서 후세에 환하게 밝혀졌다.
위험심·「에네르기」·실행력, 그리고 거의 완벽한 학식 등은 이처럼 세계의 역사책을 바꾸어 놓는 일을 성취시켜 주었다.
오늘 우리의 경주고분발굴을 보며, 「트로이」유적 발굴담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일화나 규모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처럼 귀중하고 자랑스러운 지하의 문화를 지금까지 왜 암장해 두었을까 하는 의아심이 없지 않다.
필경은 무관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무관심을 일깨워 준 발굴작업은 보물 발견의 반가움 못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를 던져 주고 있다. 발굴 이후의 보존 문제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지상에 나오면 산화작용으로 인해 부식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하에 암장해 두는 것만도 못하다. 사후 대책이 없는 발굴은 오히려 무의미하다는 얘기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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