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어딘가에 어마어마한 보물 15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보물은 진귀한 다이아몬드 왕관 같은 것이다. 허튼소리나 전설이 아니다. 프랑스 고급 보석·시계 브랜드 ‘까르띠에’가 마련한 자사의 역사 유물 보관소 얘기다. 시가로 몇천억원일지, 몇조원일지 가늠조차 힘든 보석·시계 등을 모아놓았으니 철통같은 보안은 말할 것도 없다. 위치 자체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는 곳이라 한다. 좀체 보기 힘든 유물은 아주 가끔 바깥나들이를 한다. 유명 박물관·미술관에서 여는 전시회를 위해서다. 지난해 말, 보관소에 있던 것 중 3분의 1이 넘는 대규모 작품이 오랜만에 외출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프랑스 박물관연합회(Reunion des Musees Nationaux·RMN)가 주최한 ‘까르띠에, 스타일과 역사(Cartier: Le style et l’histoire)’ 전(展)이다. week&이 국내 언론에선 유일하게 보물들을 직접 살펴봤다.
‘까르띠에, 스타일과 역사’ 전시는 파리 시내 중심부에 있는 전시·문화 공간 ‘그랑팔레’에서 열렸다. 지난해 12월 4일 시작한 전시는 모레(16일·현지시간) 막을 내린다. 전시가 막바지에 이르러서인지 개관 시간인 오전 9시가 가까워져 오자 그랑팔레 입구에 긴 줄이 늘어섰다. 까르띠에 이미지·스타일·헤리티지팀을 이끌고 있는 피에르 레네로는 “지금까지 까르띠에가 전 세계를 돌며 연 전시 중 최대 규모다. 개관 직후부터 지금까지 전시장이 늘 만원”이라고 자랑했다. 1847년부터 까르띠에가 만든 500여 점의 역사적 보석·시계를 비롯해 영국 왕실 등에서 흔쾌히 빌려준 50여 점이 더해진 풍성한 전시였다.
레네로는 “예술이 까르띠에를 이끌었고, 까르띠에가 예술가를 자극했다. RMN이 초청해 전시를 연 것 봐라.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전시 제목 그대로 현대 스타일의 역사를 되짚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를 주최한 RMN은 문화강국 프랑스에서 주요 전시 공간을 이끄는 기관이다. 우리로 치면 국립현대미술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간 몇 개를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랑팔레’가 대표선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전시는 그랑팔레 주 전시관인 ‘살롱도뇌르’에서 열렸다. RMN을 대표해 전시를 총괄한 로랑 살로메는 “그랑팔레가 현재 상업활동을 벌이는 브랜드를 초청해 전시를 여는 건 지극히 드문 경우다. 다만, 우리의 주 역할인 예술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 작품이 기술적인 완성도나 재료 면에서 진귀하고 역사적인가를 고려해 예외를 인정했다. 그게 바로 이 전시”라고 설명했다.
전시 기획자 로르 달롱은 “‘투티 프루티 스타일’만 봐도 까르띠에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 걸 확인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달롱이 예를 든 투티 프루티 스타일은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사파이어·에메랄드·루비 등 형형색색 보석과 섞어 꾸민 양식이다. 마치 과일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이렇게 불렀다. 다이아몬드 외 유색 보석은 인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됐는데, 인도를 여행 중이던 까르띠에 창업주 3세손 자크 카르티에가 유색 보석으로 새 스타일을 창조해낸 것이다. 한편 인도·파키스탄 등지의 왕족·귀족들은 19세기 말부터 파리 까르띠에를 찾아 의례용 장신구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달롱의 설명처럼 기존 고객과 다른 취향의 동양 고객들이 들고 온 새로운 재료도 까르띠에가 창조한 새 예술양식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전시를 기획한 그랑팔레는 11개의 큰 주제로 나눠 전시장을 꾸몄다. 스위스에 숨겨진 까르띠에 보물창고에서 엄선한 ‘까르띠에 컬렉션’, 거기서 또 20개만 추려낸 대표 작품들, 왕족·귀족·부자들만 가질 수 있었던 ‘티아라’ 컬렉션 등이 주요 테마였다. 이 중에서도 ‘티아라(여성용 머리장식) 컬렉션’은 지금까지 열린 전 세계 보석 전시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규모였다. 2011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치러진 ‘로열 웨딩’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식에서 캐서린 왕세손비가 썼던 티아라 등 총 25점이 전시됐다.
캐서린비의 ‘헤일로 티아라’는 본래 시증조모 엘리자베스 왕비가 남편 조지6세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이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공주 시절인 18세 생일에 물려받았고 이번 결혼식 때 다시 왕실 예식용으로 등장했다. 이 밖에도 왕위를 버린 로맨스의 주인공인 영국의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의 레이니에 대공 등 화려한 커플과 더 화려한 장신구 섹션도 마련돼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파리=강승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