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대필' 22년 만에 무죄 강기훈 "재판부, 유감표시조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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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50)씨는 웃지 않았다.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무죄선고도 그의 표정을 바꾸진 못했다.

‘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분신자살을 방조한 범죄자.’

23년간 그가 감당해야했던 ‘전과자’라는 누명의 무게 때문인 듯했다. 축하의 말을 건네는 지인들이 “얼굴 좀 펴라”고 하자 그제서야 강씨는 짜내듯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강씨가 전과의 멍에를 쓰기 시작한 건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5월 8일이다.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간부였던 고(故) 김기설(당시 25세)씨가 이날 분신자살한 것이 계기였다. 이른바 ‘강경대군 치사사건’으로 촉발된 학생운동 과정에서 김씨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유서 2장을 남긴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자살했다. 사건 발생 후 강씨는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기 바빴다.

하지만 얼마 뒤 검찰은 김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한 ‘범인’(자살방조 혐의)으로 강씨를 지목됐다. 이어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 등의 필적(筆跡)이 동일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감정결과 등을 근거로 재판에 넘겼다. 1·2심은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신빙성 있다고 판단해 유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1992년 7월 유죄 확정 판결(징역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학생운동에 대한 국민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조작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큰 반향 없이 묻혔다.

3년간 복역한 강씨는 1994년 8월 만기출소했다. 낙인이 찍혀 고통속에 살던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2007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진상조사에 나선 것이다. 위원회는 자살한 김씨의 지인이 뒤늦게 발견한 김씨 필적이 담긴 이른바 ‘전대협노트’와 ‘낙서장’을 확보해 유서의 필적과 대조했다. 결론은 “김씨가 스스로 유서를 작성했다”는 거였다.

강씨는 2008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4년 만인 2012년 10월 대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 과정은 험난했다. 1991년 당시 국과수의 감정 결과와 2007년 감정결과의 신빙성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새롭게 국과수가 “유서와 김씨의 필적이 동일필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놨지만 검찰은 새로 제출된 증거가 김씨 사후에 조작된 필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강씨의 재심에서 13일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1991년 당시 국과수 감정 결과는 담당자 한명의 의견이고 감정내용도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이를 제외한 다른 증거만으로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다만 강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부분이 재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의 형을 별도로 선고했다.

선고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강씨는 “판결 내용은 상관없다”며 “재판부가 유감 표시조차 하지 않는구나라는 게 처음 든 생각이었다”고 서운해했다. 그는 “나를 세워놓고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할게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겸허히 얘기하고 반성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건을 맡았던 수사기관이나 국과수 관계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한나 아렌트가 말한 (평범한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해 거악을 저지르는) ‘악의 평범성’이 바로 이 경우로 보인다”며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당시 수사검사들이 유감의 표시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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