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제자 김태선>|<제41화>국립경찰 창설(2)|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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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천황「히로히도」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있은 다음날인 8월16일부터 서울시내 일부경찰서에서는 일인경찰관들이 사상범들을 석방하고 한인경찰관들에게 자진해서 사무인계를 하는 곳도 있었다. 8월15일과 16일 이틀 사이에 풀려 나온 사상범은 1만1천여 명이나 됐다.
종로경찰서에서는 일인경찰관들이 구구 식 총 50여 자루를 뒤뜰에 내다 놓고 총신에 찍힌「사꾸라」꽃 압인을 모두 지운 뒤 한국인 경찰관들에게 넘겨주었다.
또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에서는 해방 다음날 요시찰인 명부 등 중요기밀문서를 현재 치안국 별관 수사지도과가 있는 빈터에 산더미처럼 내다 놓고 모두 불태웠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모든 식민지정책의 시행중추가 경찰이었고 또 일제탄압에 항거했던 애국투사들의 탄압증거가 바로 경찰에 보관돼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일경은 이 기밀문서의 소각에 손을 썼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각 주재소에서도 요시찰인 명부가 모두 배치돼 있었으나 해방되던 날 밤 일경의 지시로 모두 소각됐다.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는 8월18일까지 우리나라의 지식계급을 총망라, 독립운동을 했든 안 했든 모두 검거한다는 계획아래 관내 검거대상자명단을 작성해 놓은 것을 미처 불태우지 못해 뒤에 미군에 압수 당하기도 했다.
일인경찰관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했던 배급조합·통제조합 등을 모두 해체, 기금을 나눠 갖고 본국으로 달아날 자금마련에 급급했다.
며칠 뒤의 이야기이지만 총독부에서는 일인들의 귀환자금을 마련키 위해 그해 9월3일∼5일 동안에 무려 2억1천5백 만원의 지폐를 남발하기도 했다.
내가 그해 11월 미군정경부수사국 부국장에 취임했을 때 총독부재무국장「미스다」(빙전)가 이때의 화폐남발 혐의로 수사국에 끌려왔다.
현재 중앙청 2층에 자리잡은 수사국 사무실에 끌려온 60세가 가까운 수 전은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도「시멘트」바닥에 꿇어앉아 고개를 조아리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수사관들이 신문을 시작하자 수전은『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부하들이 가져온 서류에 도장만 찍었을 뿐입니다. 부하들을 불러다 조사해 주십시오』라며 이미 본국으로 달아나 버린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한편 경찰부장 강구웅은 8월16일부터 일본인 경찰간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일인 송환계획을 짜느라고 눈코 뜰 사이 없었다.
당시 일본인송환 총책은 경전사장 수적이었다. 경찰부장 강구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적에게 중간보고를 하러 찾아갔다.
강구웅은 그때마다 신변의 위험을 느꼈음인지 일본인 호위순사를 떼어놓고 당시 한국인 경찰관으로 경제계순사로 근무하던 김여길씨(현 서울시소방본부 행정과장)를 대동하고 다녔다.
이러는 동안 경향 각지에서는 민중들이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행위가 꼬리를 물었다.
8월17일에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주임 제하경부보가 원남동「로터리」옆 자택마당에서 청년 한 명으로부터 권총으로 저격 당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제하경부보는 고등계에 근무하면서 우리나라의 독립투사 등 사장 범을 잡아들이고 그들을 악독하게 고문하는 것으로 이름높던 일본경찰관이었다.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세상이 놀랄 큰 사건으로 수많은 부고한 애국지사들이 용의자로 잡혀 억울하게 고초를 겪었겠지만 치안이 확립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이 사건을 수사할 기구도 없었고 범인을 잡으러 나설 경찰관도 없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해방 후 가장 곤욕을 치른 경찰관들은 사상범을 다루었던 그 동계와 경제계 형사들이었다.
경제계에 근무했던 한국인경찰관 S순사 부장 집에는 해방다음날 10여명의 상인들이 몰려가 굳게 잠긴 대문을 두드리며 『작년 추석 때 뺏 어간 쌀을 내놔라』『우리 가게에서 가져간 재봉틀 내놔라』는 등 빼앗긴 물건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며 살기 등등했다.
S순사부장의 아내는 뒷담을 뛰어 넘어가 이웃싸전에서 쌀을 사다가 대문 밖으로 내밀고 안방에 있던 재봉틀을 담 구멍 밖으로 내놓아 간신히 화를 면했다. 강도·살인 등 강력범으로 일경에 잡혀 징역살이를 했던 사람보다 돈이나 물건을 수탈 당했던 사람들이 보복에 앞장섰다.
8월18일까지는 한국인 경찰관들이 자발적으로 치안유지에 나서기도 했고 일부지방에서는 일경의 경찰권을 한국인 경찰들이 인수받고 일인경찰관들을 모두 내 좇았다. 그러나 8월18일 일경은 상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경찰서를 강점, 경찰권을 행사하고 나섰다.
일제는 패전 군을 무장시켜 수백 명씩 경찰서에 배치하고 서울 종로네거리에 기관총을 내다 걸고 공포분위기를 이루었다.
한국인들의 보복으로부터 자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들은 패전국이라는 처지를 잊은 듯 전 일인경찰에 1계급 혹은 2계급씩 승진을 시켜 정부와 정부보가 범람했고 각 군부대와 군수공장에 쌓인 군수품을 매각 횡령하는 등 발악적인 행동을 자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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