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hi] 내 성적 취향 말고 성적을 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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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너 뷔스트

9일(한국시간) 소치 아들레르 아레나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 경기. 네덜란드의 이레너 뷔스트(28)는 4분00초34의 기록으로 1위에 올랐다. 2006 토리노 대회 3000m, 2010 밴쿠버 대회 1500m에 이어 세 대회 연속 금메달을 따낸 뷔스트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는 세리머니를 했다. 하지만 이날 뷔스트의 우승을 알리는 기사에는 ‘세 번째 금메달’보다 ‘게이(gay·동성애자)’란 단어가 더 많이 쓰였다. 뷔스트가 이번 대회에서 동성애자임을 밝힌 선수 중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소치 올림픽의 대표적 논쟁거리 중 하나가 ‘동성애’다. 러시아는 지난해 6월 미성년자에게 ‘비전통적 성관계’에 대한 선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른바 ‘반(反)동성애법’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지난 1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과 은퇴 선수 52명이 법의 폐지를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반동성애법 제정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각국 정상들의 올림픽 개회식 불참 사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동성애자 스포츠 사이트인 아웃스포츠닷컴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는 7명의 선수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뷔스트도 그중 한 명이다. 2009년 동료 여자 스케이터와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로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기자회견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자 답변을 거부했다. 당시 뷔스트는 같은 네덜란드의 남자 스케이팅 간판 스타 스벤 크라머(28)를 언급하며 “그에게는 인간관계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면서 왜 내게는 물어보는가. 내가 남자를 만났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케이팅에 관해서만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동성애자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뷔스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도 잘 알려진 선수다. 밴쿠버 올림픽 이후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았다가 난소에 양성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해 9월 수술대에 올랐다. 퇴원 후에도 하루 6시간의 강훈련을 소화했다. 기량을 빠르게 되찾은 뷔스트는 수술 뒤 6개월 만에 열린 2011년 종목별 세계선수권 1500m와 3000m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이번 소치에서도 당당히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뷔스트는 1000m와 1500m에도 출전해 다관왕에 도전한다.

김효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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