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부채위기로 이어지나 … 신흥국 또 하나의 뇌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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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신흥국 부채위기는 간주곡이다.” 금융위기 전문가인 고(故) 찰스 킨들버거 전 MIT대 교수가 자주 한 말이다. 외환위기가 금융위기로 번지는 과정에 부실채권 문제가 반드시 불거진다는 얘기다. 실제로 2007년 한국 원화가치가 뚝 떨어지자 부실채권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요즘 F5(취약한 5개국) 가운데 인도와 터키에선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신용평가회사인 피치는 9일 인도 부채 위기를 경고했다. 피치는 “인도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기업 빚 가운데 1조 루피(약 17조원) 정도가 조만간 부실채권(NPL)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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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실채권 1조 루피면 인도 전체 여신 가운데 16.9%(부실화율)나 된다. 기록적인 부실화율이다. 정상 수준은 2% 정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여차하면 은행파산(금융위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다.

 최근 인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올렸다. 외자 유출을 막아 루피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였다. 루피화 폭락을 방치하면 그 후유증도 만만찮다. 하지만 통화긴축 탓에 인도 내부 금리가 치솟고 있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금리)이 8.7%를 웃돌고 있다. 기준금리 인상 전보다 1.3%포인트 올랐다.

 게다가 인도 중앙은행은 최근 시중은행의 대출 규제를 강화했다. 시중은행이 5000만 루피(약 8억6000만원) 이상을 빌려주기 위해선 중앙은행에 사전에 보고해야 한다. 부채 급증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다. 가뜩이나 이자 부담이 늘고 있는 와중에 기업들의 급전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도 100대 기업이 빌려 쓴 2조 루피 가운데 절반 정도가 1년 남짓 뒤에 갚아야 하는 빚”이라고 전했다. 이런 때 통화긴축은 치명적이다. 경제가 침체에 빠져 기업 수익이 주는 판에 이자 부담은 늘어나서다.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이날 “인도 기업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이 급증할 전망”이라고 경고했다.

 터키 부채위기는 외채위기 성격이 강하다. 터키 기업들은 지난해 상반기까지 경쟁적으로 값싼 외채를 빌려 썼다. 달러나 유로화 표시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이었다. 그 규모가 1700억 달러(약 182조원)에 이른다. 2012년 말 이후 11개월 만에 21%나 급증했다.

 로이터통신은 “터기 기업들이 값싼(저금리) 외채에 취해 있는 중에 리라화 가치가 추락했다”며 “리라화로 계산한 빚 부담(원금+이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아우성치자 터키 중앙은행이 1월 말 기준금리를 단숨에 5.5%포인트 올려 10%로 정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고금리 처방으로 다급한 불(리라화 폭락)은 껐다”며 “하지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하나 찾아들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인도처럼 경기침체와 기업실적 감소 가능성이다. 터키의 올해 경제성장 전망치는 지난해보다 1%포인트 정도 낮은 3% 선이 될 전망이다. 사실상 침체 국면에 들어선 셈이다. 블룸버그는 “터키 기업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경제가 조금만 활력을 잃어도 빚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부채위기가 본격화하면 다음 단계는 은행이 파산하는 금융위기다. 킨들버거 교수는 “시중은행들이 튼튼한 대차대조표(자산과 자본 구조)를 갖고 있으면 부채위기를 견뎌내 금융위기로 번지지 않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1600년 이후 신흥국 부채위기 가운데 90% 이상이 금융위기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를 막으려면 인도·터키 등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한다. 블룸버그는 인도 뭄바이 금융시장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인도 중앙은행은 실질금리를 올려 통화가치 하락을 막을 것인지 아니면 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자국 기업의 줄도산을 막을지 결단해야 한다”고 했다. 위기 순간 전형적인 정책 딜레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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