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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제2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준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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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일구
강일구 기자 중앙일보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강일구]
마이클 그린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지난 1월 칼럼(본지 1월 8일자 28면)에서 ‘2014년의 한국’에 관한 6가지 문제를 다뤘다. 그중 하나는 한·일 관계가 복원될 것인지였다. 나는 ‘정상회담은 어렵겠지만 북한 문제나 국방 문제와 관련한 실무 차원의 협력은 나아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달이 지나면서 약간 더 낙관하게 됐다.

 그렇다면 한·일 정상회담은 올해 열릴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도쿄를 가거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서울을 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모든 한·일 양자 현안을 풀어야 한다는 압박과 관심이 너무 크다.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지만 중국은 아베 총리를 멀리하고 있는 데다 한·일 관계 개선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일 긴장관계가 중국 외교정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9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만날 수도 있다. 유엔 총회가 미국에서 열리는 만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미·일 3국 정상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상정해 볼 수 있다. 10월에는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미얀마에서, 11월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중국에서 열린다. 연내에 한·일 양국이 신뢰를 회복하고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데는 많은 장애물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

 첫째 장애물은 청와대의 대일 의구심이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다시 찾거나 그 사이에 한국민 여론에 기름을 부을 다른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의 지난해 12월 야스쿠니 참배는 사전 통보가 없었기에 많은 측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 그의 야스쿠니 참배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여론조사에서도 일본 국민은 아베 총리의 참배를 평가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다시 참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아베는 임기 첫해에 야스쿠니를 참배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지켰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정기적인 신사 참배를 공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장애물은 22일 ‘다케시마의 날’과 3월의 교과서 검정이다. 교과서 중 일부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기술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한국을 자극할 수 있지만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없다.

 일본 측도 한국을 근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만약 한국 대법원이 지난해의 고등법원 판결(일본 기업에 대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를 배상하라는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내 해당 일본 기업들의 자산이 일부 압류당할 수 있고, 그러면 일본 정부는 나머지 피소 기업들에 배상을 하지 말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이는 정치·경제적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 도쿄의 옵서버들은 한국 정부가 법원에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청구권협정)로 모든 청구권이 종료됐다’는 법적 의견서를 보내지 않는 것에 몹시 놀라고 있다(미국 정부를 비롯해 다른 모든 국가는 비슷한 소송에서 법적 의견서를 보낸다).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박 대통령이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비를 세우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도 상당히 도발적(highly provocative)이라 본다. 한국인에게 안중근은 국가 영웅이지만 일본에서는 안중근이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가 국가 영웅이다.

 정치적으로 중도이거나 중도 좌파의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를 놓고 아베를 압박하지 않고 있으며, 서울을 향한 정부의 관망 태도에 동조한다. 도쿄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에 대해서도 다소 비관적이다. 그러나 피해 배상 결정이 한·일 관계를 꽁꽁 얼어붙게 할 수 있지만 거꾸로 서울과 도쿄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양자 문제를 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위기는 잠재적 기회이기도 하다.

 가장 어려운 장애물은 일제의 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다. 한국의 감정적 상처는 너무 깊고, 아베 총리는 1993년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공식 사과(고노 담화)에 대한 주요 비판론자이기 때문이다. 아베는 201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새로운 ‘미래지향적’ 담화를 내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옵서버들은 아베가 고노 담화를 개정하거나 담화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런 견해는 너무 비관적이다.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를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내년의 담화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한국 외교는 이 담화가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강화하면서 협력 증진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간의 파트너십 공동선언처럼 말이다. 이 공동선언이 1년간의 집중적 외교의 산물이라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지금 한·일이 소극적인 양자관계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아베 정부가 생존 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공식적 보상에 동의할지는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한·일 정부가 이 사안부터 대응할 이유는 없다. 양국 모두 정상회담이 모든 현안을 풀어낼 것이란 기대는 피해야 한다.

 한·일이 부분적이라도 대화의 문을 열어 둬야 할 이유는 북한 때문이다. 최근 북한의 핵시설 주변 활동에 대한 보고나 역사적 패턴을 보면 북한은 이번 봄에 또 다른 도발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외부로부터의 위기는 한·일 간 과거사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가져가고, 왜 한국과 일본이 서로 공유하는 가치와 이익에 대한 도전에 맞서 함께 일해야 하는지를 환기시킬 것이다.

마이클 그린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일러스트=강일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