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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제자=김홍일-중공당·군내의 민족 차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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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산혁명에는 국경이 없고 「프를레타리아」앞에는 민족이란게 있을 수 없다던 「코민테른」지부 중공만의 한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우와 태도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과연 구위나 현위·특위, 심지어는 만주성위에도 한인간부들이 있기는 했었다. 또 지방당 일수록 한인간부들이 초기에는 더 많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위 이상에서는 반드시 책임자가 중국인이었으며 현위 이하의 지방조직에 있어서 비록 책임자가 한인이고 간부가 대부분이 한인이었더라도 중요당무는 반드시, 중국인간부를 통해 보고되고 처리되고 했었다.

<중요당무 중국인이 담당>
만주의 중공 당은 한인들을 받아들일 때 「코민데른」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파벌성의 지적을 전제로 해서 한인들에게 기성조직의 완전해체와 개별 입당을 제시했었다.
만주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중공당에 들어간 이래의 경과를 더듬어보면 이는 중공당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종의 통일전선에 불과했다. 공산당은 통일전선 전술로 동조세력을 묶어 이용하고 나서는 동조세력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들 목적만을 추구하는 법이다.
중공당은 초기에 한인들을 이용하고 나서 적당한 구실이 생기자 무참하게 숙청해 버렸다. 그것이 유명한 민생단 사건이다.
북한의 김성주가 처음엔 1931년 가을에 공산당(중공당일 수밖에 없다)에 입당(사실은 1932년 여름까지도 입당할 수가 없었다)했다고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입당했다는 말을 안하고 있는 것은 중공 당에 입당한 한인들의 어리석음, 돌이킬 수 없는 창피한 모습 등이 여지없이 기록에 남아있음을 뒤늦게 알고 이제 와서는 슬그머니 말을 뒤엎어 놓은 것이다.
민생단은 1932년2월 일제관헌의 조종 하에 서울의 매일신보사 부사장으로 있던 박석윤 등을 중심으로 해서 간도에서 만들어진 반공 단체이다. 구성원은 한인들이었으며 단장은 박두형이었다. 민생단은 그해7월에 이내 해체되었으므로 별반 활동이란게 있을 턱이 없다. 이내 해체된 것은 일제의 괴뢰 만주국이 발족은 했어도 기반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민생단 같은 것을 돌 불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공단체로 민생단 조직>
그러나 1934년9월에 이르러 새로 협조회라는 것이 결성되어 공산주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는데 공산당과 군안에 민생단(이미 해체는 되었지만)에 대한경계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당내 교란을 기도하기 위해 일부러 민생단 공작이란 것을 전개했었다.
즉 민생단원을 자칭하면서 공산당·군을 습격한다든지 또는 당과 군내에 민생단원이 잠복해 있는 것 같이 말을 퍼뜨림으로써 당·군을 소란 속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동만 특위 내에는 일본군만의 공격에 쫓기고 또 포위망 때문에 양도가 끊기는 등 곤경에 처해 일본측 통치지역에 들어가 당 조직을 재건하자는 의견과 계속 무력 행동으로 퇴세를 만회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견대립이 생기면서도 상대편을 혹시 민생단원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는 풍조가 생겼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을 못미더워 결국은 살해 해치우는 숙청 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도 한인에 국한해서만 이었다. 민생단이다, 협조회다 하는 것이 한인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공 당 및 군내에서는 한인으로서 다소라도 의심쩍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의당 민생단원의 혐의를 받게되었다.
협조회의 한 오지공작대원은 1935년1월3일 총도 없이 홀로 동북인민혁명군의 한 부대의 근거지인 연길현사방대까지 접근해 갔다. 제2보초선에서 보초병을 만나자 『나는 적(만주국)의 통치구역 안의 조직으로부터 만의 공작보고 차 왔다』고 속이고 보초병들을 안심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때 마침 그 부대의 식량운반대장인 한영호란자가 약탈한 식량운반을 의해 백초구오지 부근으로 나가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으므로 보초병에게 『한영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고 물으면서 잡담을 주고받다가 짬을 봐 보초병의 총을 빼앗아 갖고 격투 끝에 도망쳐왔다.
이 일이 있자 이 부대에서는 한영호를 민생단원으로 보고 고문 끝에 죽여버렸다. 고문은 당 및 군 내부에 있는 같은 민생단원이 누구누구이냐를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조·심문은 중국인이 담당했다. 한인들 이름을 일일이 들어가면서 아무개도 민생단원이지 하는 식의 고문이었다. 한은 죽어가면서 묻는 대로 박춘·주진(동만특위하 총 유격대장이었으며 이것을 기초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가 편성되어 그는 2사장이었다.) 등도 같은 패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상묵의 반당 호소문>
박춘과 주진도 체포되었다. 박춘이 먼저 고문을 당하자 그도 묻는 대로 주진 이상묵(동만특위조직 부장)도 민생단원이라 대답 안할 수가 없었다. 주진과 이상묵은 중국인동지들에 의해 살해될 것이 뻔하므로 그 곳을 탈주하고 말았다.
탈주한 이상묵은 너무 억울했을 뿐 아니라 중국인동지들의 처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의 고문은 흑백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도시 한인을 모두 민생단원으로 몰자는 수작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공산주의자였으며 백난을 무릅쓰고 중국인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해 온 자기들 고급간부마저 죽어 가는 사람이 고통에 못 이겨 내뱉은 소리 한마디로 의심하고 살해해 버리는 중국인 공산당들의 잔인한 민족차별에 그는 이를 갈았다. 중공당에 입당했던 자기들의 과오에 소름이 끼쳤다.
1935년1월에 탈주해 나온 이상묵은 그해 4월1일 「경애하는 혼춘현 조선인당원제군」이라는 제목으로 중공만을 배격하는 글을 한인당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그 글 속에서 『우리는 일찍 혁명전선에 나서 중공당과 공농계급을 위해 사력을 다해 이상실현에 힘써왔다. 그러나 중공 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우리에게 반동분자란 이름밖에 준 것이 없지 않은가. 오늘날 중공 당은 과거에 있어서의 조선사람의 광휘있는 투쟁사를 뺏어 중국인의 역사로 옮기려하고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도 늦었던 것이다. 약1년 동안 숨어 다녔으나 별 신통한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상묵은 조용히 농사나 짓기 위해 숨어 다니는 생활을 털고 다음해 4월 하순에 일만측에 돌아서고 말았다.
민생단 사건으로 인한 한인의 피해는 중공당 만주성위가 철저한 숙청공작을 무자비하게 전개하라고 지령한데서 가승 됐었다. 이 지령으로 한인당원에 대한 탄압은 절정에 달했던, 것이며, 그 결과 무참히 살해된 자 4백여명에 달했고 이 피의 숙청에 겁내어 탈주하는 자 뒤를 이었다. 뿐 아니라 중국인들에 의한 너무도 억울한 고문·의심·살해 등에 반발하여 한인 당원들은 거꾸로 중국인 동지들에게 학살로 보복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중국인과 한인사이에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계속됐던 것이다.

<환생자만 모두 4백여명>
이와같은 중한공산당원 사이의 알력은 동만에 만 있은 것이 아니고 그것이 만주성위하 각 지방에 번져 갔었다. 남만에서는 10년의 투쟁경력을 가졌던 애꾸눈 한진과 또 이론가로 이름났던 청원현위 위원 이규항 등이 그의 부하들과 더불어 처형되었고 또 북만의 탕원지방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장 하운계(중국인)의 아편 흡입을 나무라는 제6군 참모장 이인근(한인)과 그 부하들이 민생단원이란 누명으로 총살당하는 일조차 있었다.
중공당 및 군내에서 처참한 위치에 놓여진 나머지 한인들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민족차별을 받아야할 일이 또 겹쳤으니 그것은 만주성위의 『혁명운동의 기초를 고려인으로부터 중국인으로 전환하라』는 방침의 시달이었다. 이 지령은 『만주에 있는 고려소수민족은 과거에 있어서 민족운동에 실패하고 그후 제1, 2, 3차 공산운동도 파쟁으로 실패했으며 소수민족으로서 공산운동의 성공은 불가능하다.
이들 분자는 동요하기 쉽고 반동화하기 쉬우므로 소수민족의 혁명기초는 공고하지 못하므로 혁명운동의 기초를 고려인으로부터 전환하여 중국인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당 및 군내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여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간부자리에 있을 수도, 오를 수도 없게된다. 그러고도 남은 한인은 철저한 충견이오, 용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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