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로 시작, 웨스트엔드 진출 … 꿈 이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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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영국 웨스트엔드의 ‘미스 사이공’ 무대에 서는 뮤지컬 배우 홍광호. 그는 “배역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관객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 번의 성공이 천 번의 실패를 덮는다잖아요. 실패하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도전했습니다.”

 ‘뮤지컬 본고장’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무대에 서게 된 배우 홍광호(32). 오는 5월 웨스트엔드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 개막하는 ‘미스 사이공’ 25주년 기념 공연에 투이 역으로 캐스팅된 그는 “고등학교 때 막연하게 꿨던 꿈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28일 오후 서울 신당동 소속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꿈을 이룬 과정을 들어봤다. ‘미스 사이공’ 국내 제작사인 KCMI를 통해 오디션에 응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온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처음엔 ‘영어도 못하는 내가?’란 생각이 들었는데, 금세 ‘한번 도전해볼까’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정상 이틀 만에 오디션용 영상을 만들어야 했다. 뮤지컬 ‘명성황후’ ‘엘리자벳’ ‘맘마미아’ 등의 음악을 맡았던 김문정(43) 음악감독의 지도를 받아 극 중 투이의 노래 세 곡을 불렀다. 영국인 친구에게 영어 발음 교정을 받은 뒤 영상을 만들어 영국 제작사로 보냈고, 지난 연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해를 넘겨 지난 27일 공식발표을 하게 된 것은 계약조건의 조정 절차를 밟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는 도전정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삶의 변화는 무대에서 전한 그의 대사로부터 시작됐다.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한 채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2012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 역을 맡았을 때 그의 대사다. 스스로 ‘내 꿈이 무엇이었나’ 되돌아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그에게 ‘미스 사이공’은 인생의 고비마다 기회를 던져준 작품이다. 2002년 뮤지컬 ‘명성황후’로 데뷔한 뒤 숱한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다. 그땐 ‘가수를 해야되나. 가수를 하기엔 너무 못생겼는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단다. 그러다 2006년 다시 서게 된 무대가 ‘미스 사이공’이었다. 혹 주인공에게 문제가 생기면 대타로 나서는 ‘커버 배우’로 캐스팅됐다. 종연 1주일 전 남자 주인공이 후두염에 걸리는 사고가 생겼다. 갑자기 그가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게 됐다. 뮤지컬계의 샛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등 국내 뮤지컬 무대에서 그는 이제 늘 주인공을 맡는 자리에 올라와 있다.

 이번에 ‘미스 사이공’에서 맡은 인물 투이는 어린시절 정혼한 여주인공 킴을 미국인 병사 크리스에게 빼앗기고 비극적 죽음을 맞는 베트남 남자다. 주요 배역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동양인이 맡을 수 있는 배역엔 한계가 있죠. 하지만 주연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류현진도 메이저리그에선 ‘3선발’아닌가요? 종주국 명문팀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큰 공부가 되겠지요.”

 영국에서 ‘미스 사이공’ 제작사를 이끌고 있는 카메론 매킨토시(68)는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캣츠’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 ‘오페라의 유령’을 만든 전설적인 제작자다. 매킨토시는 27일 제작사 홈페이지를 통해 투이 캐스팅 결과를 직접 발표하며, 홍광호에 대해 “정말 특별한 배우”라고 말했다.

홍광호에게 가장 특별한 건 목소리다. 깊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3옥타브 이상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 늘 붙어다니는 말이 ‘미친 가창력’이다.

 “처음엔 ‘미친’이란 수식어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아버지가 카톡으로 보내주신 글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할 수 없고, 즐기는 자는 미친 자를 당할 수 없다’를 보고 마음을 바꿨죠.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홍광호=1982년생. 계원예고 연극영화과, 중앙대 연극학과 졸업. 2002년 뮤지컬 ‘명성황후’ 앙상블 멤버로 프로무대 데뷔. 2009년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13년 7월 뮤지컬 배우 최초로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 홀 단독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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