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동양 삼국을 갈라놓은 역사대치선에 결국 총성이 울릴 것인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또 수상쩍은 발언을 내뱉었다. 이번엔 세계지도자들이 모인 다보스포럼 연차회의에서다. “중·일 간 어떤 물리적 충돌이나 분쟁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 그러곤 100년 전 영국·독일의 격돌을 들먹였다. 겁 주는 것일까? 중국이 전격 공개한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촉발된 탓일까? 위험한 인물은 또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초대 총리(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고 그 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 권부의 역사의식은 100년 전에 꽂혀 있다.

 안 의사는 테러리스트고, 사형판결을 받았다? 누가 어떤 논리로 판결을 강행했나?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역은 중국 영토지만 러시아 관할구역이었다. 그곳에서 한국군 참모장이 일본군 수뇌를 살해했다. 총성은 동아시아의 복합 교향시였다. 일본은 안 의사를 뤼순으로 급히 연행했고 일본 형법을 적용했다. 국제법상 불법이었다. 그러곤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결행한 항일거사’임을 일소하고 ‘사격에 능숙한 포수의 무모한 암살’로 규정해 사건을 서둘러 종결했다. 국가 차원의 항일조직 존재가 밝혀질 경우 국제적 비난이 쏟아질 것을 우려했던 거다. ‘적국의 포로가 된 한국 의병인 나에게 만국공법을 적용하라’는 안 의사의 주장은 일축됐다. 일본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조선을 섭정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안중근의 사형소식에 조시(弔詩)를 바쳤을까.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살아 백세는 없는데 죽어 천년을 가리.”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옥중에서 집필한 ‘저격 사유 15개조’에는 ‘동양평화를 파상(破傷)하여 인종의 멸절을 초래한’ 이토의 인류사적 죄상이 빼곡히 적혀 있다. 구주열강이 노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동양 삼국의 결속과 도덕적 역할을 해야 할 문명국이 오히려 야만을 일삼으니 독부(獨夫)의 환(患)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꾸짖었다. 그 준엄한 훈계는 35년 뒤 불행하게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수만 중국인을 교살하고, 수십만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동남아시아를 폐허로 만든 죄, 인종주의와 아시아연대론을 앞세워 ‘같은 종족, 이웃 나라를 박할(剝割)한’ 박죄가 바로 그 역천(逆天)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을 평화론으로 치장한 것 자체가 테러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억지는 오히려 세계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다.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견지한다”는 천황의 약속은 기만이었고 그 희대의 사기극을 대행한 자가 이토였다.

 아베는 조슈(長州)번의 정치적 후손이다. 정신적 지도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우며 명치유신의 실력자가 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인데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그의 문하생이고, A급 전범자이자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계보를 이었다. 아베는 정한론과 만주정벌론을 주창한 쇼인의 상속자인 셈이다. 아베와 그의 내각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다시 맞닥뜨리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역사는 자주 반복된다.

 역사교육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그런데 요즘 세간을 달군 한국사 교과서에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안중근 관련 서술이 달랑 한 줄에 그친다. “안중근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다”(삼화출판사),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지학사와 교학사). 이게 전부다. 사진에 약간의 부가설명이 달려 있으나 학생들로서는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아베 내각의 정한론적 주장을 조리 있게 반박하지 못한다. 사형 집행 전 관동도독부 법원장 히라이시(平石氏人)와의 면담기록, 옥중 집필한 ‘동양평화론’을 접해야 아시아연대를 거쳐 세계평화주의로 나가고자 한 그 웅대한 구상을 깨닫게 된다. 일본이 ‘동양평화론’에 약간만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태평양전쟁, 원폭, 분단 같은 20세기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중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동양평화론과 가톨릭 천명의식은 상통한다. 그는 교수대에 오르면서 하늘 아래 인간은 인종차이를 넘어 한 가족이자 천주의 의자(義子)임을 다시 새겼을 거다. 2011년 10월 서울대교구가 안중근 토마스를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한 적이 있다. 혹, 올 8월에 내한 예정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복음메시지에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겨준다면 일본 제국주의 유전자에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 종주국들이 빈국과 빈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달라는 교황의 다보스포럼 메시지는 100년 전 안중근이 외친 동양평화론과 정확히 부합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