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김훈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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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훈 작가의 일산 작업실에는 안중근 의사 사진, 필일신(必日新)이 쓰인 칠판이 걸려 있다. [장진영 기자]

산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 김소월(1902~34) ‘산유화’ 중에서

청소년 시절에 나는 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싱겁고 무의미한 헛소리로 들렸다. 그 배고프고 짓밟힌 시절에 나와 내 친구들은 비틀스, 폴 앵커, 저니 마티스 그리고 나중에는 세시봉 패거리들에게 빨려 들어갔다. 김소월은 당연히 낄 자리가 없었다. 학교 음악시간에는 이승만 대통령 찬가, 6·25 노래, 광복절 노래, 국토 재건대 노래를 가르쳤다. 나는 학교를 싫어했다. 내 친구 중에는, 나중에 혁명가가 되어서 학교라는 혐오시설을 없애버리는 꿈을 키우는 아이도 있었다. 김소월은 교과서에 나올 뿐,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나는 초로(初老)를 지나서 이 두 줄을 겨우 좀 알게 되었다. 늙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을 자득(自得)이라고 한다. ‘적은 새요’를 요즘 책에서는 ‘작은 새여’로 바꾸어 놓았다. 논리적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적에 읽은 대로 ‘적은 새요’의 편이다. ‘여’는 대상을 불러서 끌어들이거나 고함을 질러서 대상을 규정하고 낙인찍는다. ‘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간접적 말 걸기의 수줍음이다. 그래서 이 두 줄 속에서 산·꽃·새는 존재의 윤곽을 허물면서 서로 스미고, 피다 지다 울다 살다는 삶의 네 가지 극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데 이어져서 시간 속을 출렁거리며 흘러간다.

 이 시는 스스로 운행하는 자동사(自動詞)의 세계다. 삶이 피다 지다 울다 살다처럼 한 음절짜리 자동사 4개에 실려 간다. 혁명을 꿈꾸던 내 어린 날의 친구도 이제는 늙어서 이 시를 좋아하는데, 자득의 내용은 본래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월은 서른두 살에 죽었다.

김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