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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제11화 등기마을의 고려동전얘기(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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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구등기 성지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고려동전이 지금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그 행방은 묘연하다. 그렇지만 이 지방에 남은 전승기록을 통해서 그것이 고려 숙종조(1095∼1105) 이후에 주조된「해동통보」「삼한통보」등 동화와 충렬왕(1274∼1308) 대의 쇄전(은·동의 합주화)까지를 포함한 막대한 수량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고려팔만대장경과 고려청자로서 대표되는 전성기 고려시대의 문화가 세계를 놀라게 할만큼 찬란한 것이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문물 제도 중에는 화폐의 주조와 통화제도의 확립이라는 놀라운 면도 포함된다.

<무역으로 거부축적>
일찌기 주전관의 설치(숙종2년·1097)를 공포했던 고려왕조의 통화정책은 세계 화폐사장 유례를 볼 수 없는 한반도 국토모양의 은화(대은병)를 발행(숙종6년·1106)한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서도 특기할 만한 것이다. 『고려사』『동국통일』등의 사서에 의하면 숙종은 이「대은병」의 보조화폐로서 6종의 전화를 주조케 했으며 또 원나라에서 수입한 지폐인 「지원보초」·「중통보초」등을 통해 대외무역의 결제수단으로 삼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진단학회편『한국사』중세편PP319∼322 및 한국은행 발권부『한국 화폐사』PP13∼17참조).
그러니까, 이 같은 고려화폐들이 일본동북지방의 오지, 이곳「후지사끼」의 땅속에 묻힌 경위는 그때 이후 이 고장과 한반도와의 교류관계를 살핌으로써 비로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소입원옹과 공민관장 신씨는 그 경위를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설정한다.
첫째는 12세기께 이곳 등기성외 안동포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활발한 대외무역의 소산이라는 것.
이곳 등기성은 앞서도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계 한인의 후손인 안동 고성구에 의해 1092년에 축조된 것인데 그 안동씨 일족은 대대로 이른바「안동선」이라 불리던 대선단을 거느리고, 고려와 또 멀리 송나라에까지 진출, 활발한 대외무역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거만의 부를 축적, 일본 경락의 집권세력인 등원 씨를 능가하는 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그 안동씨의 외척들 가운데에는 스스로를 특히「육오의 등원씨」라 자칭하고 이곳 평천이란 곳에 기내의「경도」와 맞먹는 도읍을 새로 건설했다. 그리고선 한국과 중국(송)으로부터 승려를 초청, 13개종의 불교본산을 열고 방마다 호화찬란한 대가람을 세우기까지 했다.

<당전도 함께 출토>
지금 청삼현 남진경군시포촌에 터만 남은「십삼산왕방지」가 그 대가람들이 서 있던 곳인데, 그때 여기 세워진 절들 중에는 율종(백제승·달도방)을 비롯하여 임제종(광초방), 천태종(시화방), 법화종(서운방) 법상종(선량방) 등 백제계 승려에 의해 개기된 5개종을 비롯, 대일종(해각방), 화엄종(조각방) 등 신라계의 2개종, 그리고 염불종(고구려계 승려·팔상방)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안동선의 해외무역이 얼마나 활발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고, 그때 고려의 동전·쇄전 등을 포함한 많은 한국 물산들이 이곳에 무더기로 반입되어 후일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고려동전과 함께 출토됐다는 당전들의 주조연대가 홍무(명태조 재위시의 연호·1368∼1398)와 영락(명성조대·l403∼1424)으로 돼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반입이 어쩌면 그 보다도 더 뒤일 수도 있다는 둘쨋번 가정을 낳게 한다. 그것은 15세기께 이래 대대로 이곳 진경번주로 책봉된 진경가의 가신「부젠노가미」유천조흥의 짓이 아닌가 하는 상정이 곧 그것이다.
이 유천조흥이란 자는 임신왜란 당시 풍신수길의 이른바 정명군수군의 길잡이요, 그 외교고문역할을 했던 대마도「무네」(종)씨의 가신 유천조신의 아들. 그가 이곳 동북지방 진경번의 가신이 된 것은 그 아비가 관련된 이른바「국서 개찬 사건」때문이었다.
대마번주 종의지의 가노직에 있던 유천조신은 일찍부터 한국과 명나라 인도 등지와 교역, 거리를 얻은 자였었는데, 어쩌다가 대마번주의 총신이 되어 임진란 때에는 전후 여러 차례 한국에 사절로 내왕, 선조로부터 서훈을 받기까지 한 자이다.

<유배 길의 밑천 삼아>
그 뒤 덕천막부가 들어서자 2대 장군 수충 및 3대 장군 가광이 각각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광해9년·1617 및 인조 13년·1635)를 대마번주 종씨가 임의로 개봉, 그 글 중에 있는「일본국원수사」를「일본국왕원수사」, 「일본국주」를「일본국왕」으로 바꿔 썼다가 탄로 난 것이 전기한「국서 개찬 사건」이다. 그 결과 대마번 가노직에 있던 조신은 이곳 동북지방의 오지 진경번으로 유형을 당했던 것이다.
주인 대마번주 종씨가 저지른 죄를 입어 멀리 귀양길을 떠나는 그가 뒷일을 생각하여 평소에 모아 가지고 있던 당전과 고려동전들을 몰래 그 유배지인 홍전시까지 실어 가고 그것을 그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구등기 성터 땅속에 묻어 두었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옛 안동선의 고사를 생각하고 여차직하면 자신의 젊은 시절의 대외무역의 경험을 살릴 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차항 끝>
【부기】본 연재 제11화를 위하여 많은 자료와 사진 등을 제공해준 등기정공민관장 신집명씨를 비롯하여 기꺼이 현장안내를 맡고 나선 홍전대 암강풍교수 및 소립원심조옹, 그리고 청삼·추전지구 대한민국 교육문학「센터」소장 김공칠씨와 민단 청삼현중홍남지부 사무국장 제상호씨에게 깊은 사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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