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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세상 치유, 선비가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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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의 ‘서당체험’ 수강생들이 유생들이 입던 옷을 입고 붓글씨와 문인화를 배우고 있다. [사진 대동문화재단]
광주 월봉서원 유교 아카데미 참석자들이 떡메치기를 하고 있다. [사진 월봉서원]

“아는(머리) 것과 행하는(가슴) 것이 일치할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감을 느낍니다.“

 지난 19일 오후 1시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봉서원. ‘유교아카데미’ 수강생 50여 명이 마이크를 든 강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만남을 통해 유교의 가치를 설명하는 강좌였다. 지난 12일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5월 11일까지 18주 동안 전문적인 유교사상을 교육한다. 일요일마다 6시간씩인 강의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다. 전남지역 문화유산해설사나 공무원, 일반인이 매주 모여 인문적인 교양을 쌓고 있다.

 “고봉 선생은 가슴과 머리가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용(中庸)이라 했습니다. 어렵지 않지요?”

 강사인 강기욱(52) 고봉학술원 기획실장의 물음에 수강생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부지런히 받아 적는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김채림(47·여·전남 장성군)씨는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쉽고 명확하게 알아간다는 재미 때문에 절로 서원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폐쇄적인 공간으로만 인식됐던 서원과 향교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유생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역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열린 문화교육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현재 전국에는 월봉서원처럼 전통사상과 현대인들의 삶을 연계하려는 서원과 향교가 930개가 넘는다.

 이런 변화에 맞춰 문화재청이 색다른 실험에 나섰다. 서원과 향교를 현대인의 문화적 소양을 키우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이름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만들기’. 전국 서원과 향교 중 38곳을 전통과 현대적 가치가 조화를 이룬 문화의 공간으로 만들려는 게 골자다. 전통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내려는 사업에는 국비와 지방비 등 24억원이 투입된다. 과거 선비들의 생활문화 체험과 인성·예절교육, 유교의례와 현대의 만남 체험, 문화재 답사 등이 추진된다.

 호남과 제주에서는 총 14곳에서 사업이 진행된다. 광주에서는 ‘월봉서원이 건네는 선비의 하루’라는 프로그램이 선정됐다. 2008년부터 월봉서원이 해 온 ‘유교아카데미’나 ‘꼬마철학자 상상학교’ 등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형태다.

 전남에서는 장성 필암서원과 나주향교 등 7곳에서 문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이벤트가 열린다. 필암서원은 ‘문불여(文不如), 무불여(武不如) 장성에서의 1박2일’을 한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이 “문불여 장성(文不如 長城·학문은 장성만 한 곳이 없다)”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 프로그램이다. 필암서원과 인근 봉암서원을 둘러보며 선조들의 지혜와 예절을 배우고 청백리 체험도 한다. 이곳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기리는 서원으로도 유명하다.

 전북에서는 정읍 무성서원의 ‘태산아! 무성하게!’와 진안향교 ‘고전 연수교실 및 고전요체(古典要諦)를 통한 실용학습’ 등 3개가 선정됐다. 남원향교에서는 ‘전통문화 진흥사업’이 추진된다. 모두 청소년 인성교육과 현대인의 인문정신 회복에 초점이 맞춰졌다.

 제주에서는 제주시내 제주향교의 ‘놀멍, 쉬멍, 배우멍!’과 서귀포시 대정향교 ‘서예교실’, 정의향교 ‘살아 숨쉬는 향교’ 등 3개 사업이 열린다.

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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