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아닌 뤼순 끌고 가 재판 … 일본의 꼼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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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국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을 계기로 안 의사의 의거가 재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안 의사의 재판 자체가 세계 형법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사법 체계 왜곡과 외교 압력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부각되지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세 발을 명중시킨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안 의사의 신병은 일본에 넘겨지고, 기차로 열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중국땅 뤼순까지 가서 재판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하얼빈은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조차(租借) 형식으로 빼앗은 땅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재판권은 러시아에 있었다. 안 의사에 대한 예비 심문도 러시아헌병소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은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국은 한국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므로 일본국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로부터 안 의사의 신병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일제의 관동도독부 산하 뤼순지방법원에서 기소했다. 러시아가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외국인 피의자의 신병을 일본 관할지로 옮긴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에게서 합법적으로 인도 받았다”고 설명했지만,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로서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이런 ‘꼼수’를 쓴 이유는 안 의사가 국제법에 의거해 재판받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안 의사의 재판에 대한 책을 저술한 유재원 변호사는 “당시 언론에서는 러시아 법원에서 국제법(만국공법)이 적용되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거라는 점이 고려돼 3년 이하 형도 가능하다고 봤다”며 “군인이 전쟁 중 비정규전을 벌여 적국 수뇌를 살해한 것이므로 국익을 위한 정당행위로 평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친일 외교관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전명운 선생처럼 ‘공정한 재판’을 받는 일을 막고자 했던 일본의 의도도 엿보인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두 애국지사는 1908년 3월 23일 일본의 지배가 한국에 유익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총격해 숨지게 했다. 장 선생은 현지 경찰에 붙잡힌 뒤 재판에서 ‘애국적 환상’을 이유로 2급 살인죄가 적용돼 사형을 면했고,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뒤 11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옥했다. 전 선생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일본은 이런 사태가 재연되거나 안 의사가 국제적 주목을 끄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용군사령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히고 “개인자격이 아닌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사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범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전쟁교전에 관한 조약 적용, 포로 대우 등 안 의사의 요구를 묵살하고 “조선에서 포수로 활동하던 안중근이 이토에게 막연한 적개심을 품고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며 일반 살인범으로 기소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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