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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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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원에서. 돌이질하던 바람들이 떠나간
그 정적 속에서 나의 하얀 손들이 흔들리고 있다.
무지와 퍼렇게 눈에 불을 켜들고
돌아가던 한 시절
이제 나는 외로와야 한다.
많이
외로와야 한다
크고 훌륭할 강은 범람원을 이루고
검푸른 바다를 향하고
날마다 메마른 손바닥에 떨어지는 유리의
참담한 햇빛처럼
보잘 것 없는 가슴으로 나는 그를 향할 때,
구멍 뚫린 잠과 잠의 수렁에서
깨어난 지금
태양은 낯서른 각도에서 흘러간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리라>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시간에
나는 기다린다.
외진 흙벽에 기대
이빠진 술잔에 저무는 마을을 보다가
잠들 때도
싱싱한 공기와 음향은 친밀한 것,
목숨 위에 이내 어두워지는 작은 이슬
이제 은은한 빛으로 녹아가는 내 음성은
보이지 않는 자정의 얼굴 할퀴어
살별 흐르는 상처도 만들어 주고.
늘 두려운 눈을 가진 아이가 발견하는
나의 사계여.
가진 자에게 비굴함이 없는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하여,
건강과 용기를 딛고 올라서는 아침을 마시기 위하여,
눈 먼 내 전신을 흘러내리는
꿈이 꿈을 갉아먹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스리기 위하여
나는 나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드는 포도즙을 본다.
돌이켜 다오.
그 징그럽던 여름 능구렁이 울음도 그치고,
아침이면 불편한 머릿속에 늘 밝아 있던
꽃 그리매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고 간 상징이여.
그 슬프도록 미쁘오신 마리아의 옷자락을
돌이켜 다오.
아득한 항로의 마지막 층계에 부딪쳐 울리는,
내전에 숨어 있는 내 나이대로의 바다
잠시 나를 떠났다가
생전에 박아 두었던 근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동촉 밝혀 찾아오는 길은 하염없이 멀지만,
그곳에는 달빛이 차갑고, 크고 엄숙한 그늘이 날개처럼
드리워 있다.
나의 소망은 그 바다에서
눈을 뜨는 작은 돌멩이
낱낱이 갈라지는 빛의 한 부분이며 또한 조화된 생명이다.
나의 발이 지나간 어두운 증거가
곳곳에
한 무더기씩 불타는 불꽃의 결정으로 쌓이고,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저 너머 언덕 위에 있고,
부끄럼 잘 타는 나의 눈빛은 가물거리고,
가까이 있다 믿어지지 않는 새벽.
새벽에
젖빛이 도는 꽃병이며 자개며 소반들은
상쾌함에 감겨서
깊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내 안의 헐어진 예배당에서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겁 많은 손을 흔들 때,
드디어는 끄덕이는 내 머리가
발 밑에 내려와,
빈가지 깊숙이 남몰래 타는 꽃대의 동촉
그 구원한 빛의 찬란한 높이로 타오를 때,
쓰러지는 집들을 울리는 속삭임같이
그것은 평원에서 부서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를 여는 새로운 아픔
내가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내가 갖는 나의 꿈이 몇 장의 때묻은 지폐로 나부끼는
아침일지라도,
나무의 눈, 짐승의 눈
물의 영원한 흐름이 나의 책상 위에 넘치리.
나는 잠들었으면 하지만,
숙면 속에서 맑은 깨달음이여.
이제 알았으리,
어둠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일어나라.
너의 입술에 가까이 갈 힘을 회복하게 하라.
흰 달빛 까마귀 떼가 날으는 밤이
우리들의 등피를 잡목림 사이로 날려버린다.
내 금빛 언어들 하나씩 떨어져 팔랑거리는
낙과의 가을을 달리다가,
은밀한 정적 속에
나의 차가운 손(수)을 멈추게 하라.
두 손을 모으게 하라.
내 몸 있는 데로 내어 맡기고
죽음이 웃음 짓는 소리 들리는
캄캄한 시간, 저 밖의 녹슨 문고리를 벗기던,
무지와 퍼렇게 불 뿜던 눈을 가지고 비틀거리던,
한 많은 날들이여.
-나는 아직도 많이 외로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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