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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파리서 출간된 소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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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떻게 하여 사람들은 이 비밀의 군도에 가게 되는가? 친애하는 독자여, 나처럼 죽기 위해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체포라는 과정을 통해 홀로, 그리고 강제로 그 곳에 갈 수가 있다.
우주엔 많은 생물들이 있듯이 많은 다른 중심들이 있다. 우리들 개개인은 하나의 중심이며 따라서 누군가가 문득 찾아와 『너를 체포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우주는 박살이 나고 만다.
체포는 한 밤중의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나 사나운 「노크」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체포는 닦지도 않은 더러운 긴 장화를 신은 비밀 경찰의 거만한 침입과 함께 찾아온다.
체포는 두들겨 맞아 겁에 질린 사람들이 비밀 경찰의 등뒤에서 현장을 목격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전형적인 체포는 또한 희생자가 끌려간 연후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부수고 찢고 옷장과 서랍 속에서 물건들을 끄집어내 마룻바닥에 내던지고 흔들고 무엇인가를 뒤집어엎고 하는 따위의 행위를 수반한다.
기관차 운전사인 「이노신」이 체포될 당시 그의 방에는 방금 죽은 그의 아이의 시체를 담은 관이 누워 있었다. 『경찰관』들은 관에서 어린 시체를 끄내 집어던지고 관을 수색하는가하면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흔들어 일깨우고 붕대를 풀어헤친 뒤 그 밑을 수색했다.
1937년 의사 「카자코프」의 연구소를 수색한 『특별 조사반원』들은 「카자코프」가 개발한 특효약이 담긴 약병을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 약으로 치유된 환자들과 가료 중의 환자들이 제발 그 신비의 약 병만은 보존해 달라고 애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국은 그 특효약이 독약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독약이라면 어째서 그것을 증거 자료로서 보존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티베트」문제 전문가인 「보스트리고프」로부터 희귀한 고대「티베트」어 고본들을 압수해 갔으며 「보스트리코프」의 제자들이 KGB(비밀경찰)의 손에서 그것들을 다시 빼내는데는 30년이나 걸렸다. 동양학자 「네프스키」가 체포되었을 때 그들은 「탕구트」고본들을 압수했으나 그는 죽은지 25년 후 이 고대문을 판독한 공로로「레닌」상을 수여 받았다.
그들은 「크라게트」에게서 「예니세이오스트바크」족의 문서들이 소수민족을 위해 개발한 「알파베트」와 어휘를 사용치 못하게 금지시킴으로써 이 소수 민족은 문자를 가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것들을 정상적인 언어로 묘사하자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해당하는 적절한 속담이 하나있다.
『그들은 거기 존재하지도 않는 그 무엇을 찾고 있다.』
뒤에 남은 사람들에겐 난파당하고 황폐해 버린 인생의 긴 꼬리만이 안겨진다.
그리고 음식 꾸러미라도 날라보려는 노력이 남는다. 그러나 창문너머로 짖어대는 듯한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한다.
『여긴 그런 이름을 가진 자는 없어!』
『그런 이름은 들어본 일이 없어!』 그렇다.
최악의 시절 「레닌그라드」에선 바로 그 창문 앞에 당도하기 위해서만도 5일 동안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했다. 구금된 자들은 반년 또는 1년이 지나서야 회답을 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교신할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통보가 전해진다.
그걸로 끝이라는 얘기인 것이다. 『교신할 권리를 박탈당했다』함은 거의 틀림없이 『총살당했음』을 시사한다. 체포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이르마·멘델」이라는 한 「헝가리」부인은 1926년 「코민테른」을 통해 「볼쇼이」극장의 앞 좌석표 2장을 입수했다.
그녀는 동반자인 「클레갈」검사와 함께 극장에 가서 매우 정답게 구경을 했다. 공연이 끝나자 그는 그녀를 곧장 「루비양카」형무소로 연행했다.
만일 1927년6월 꽃이 만발한 어느 날 방금 하늘색 옷을 사 입은 붉은 머리칼의 미녀 「안나·스크리프니코바」가 「쿠즈네츠키」에서 어떤 젊은 남자와 함께 「택시」에 올라 탈 경우 그것은 운전사가 생각한대로 연인끼리의 밀회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체포였던 것이다.
또 예를 들어 당신이 AD(알렉산드르·돌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대사관 고용인이라 하더라도 백주에 「고르키」가에서 체포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낯모를 친구가 군중들 건너편에서 당신을 부를 것이다.
『「헤이」「사샤」, 오랜만이오. 이리 오시오. 여길 좀 빠져나갑시다』그 순간 「포베다」「세단」자동차 한대가 인도 옆에 와 닿는다.
며칠 후 「타스」통신은 소련 정부의 유능한 주무당국은 AD씨의 실종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뭇 분노에 찬 성명을 모든 신문에 게재할 것이다. 모른다는 데야 이상할 것이 뭐 있는가? 1937년 「노보체르카스트』의 비밀 경찰 면회실에 한 여인이 찾아와 체포된 그녀 이웃의 어린아이가 굶고 있는데 어찌했으면 좋은가고 물었다.
『앉으시오.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 다음 몇 시간 후 그녀를 끌어다가 감방에 처넣어버렸다.
우리는 또 작가 「막심·고리키」의 항의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체포당한 허다한 집단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1919년9월15일 「레닌」은 「고리키」에게 썩어빠진 「인텔리」들을 위해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탐보프」성에서 대부분의 촌락 주민들을 강제 이동시킨 것은 1921년6월이었다.
반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의 가족을 수용하기 위해 성 전역에 집단 수용소들이 세워졌다.
넓은 들판을 가시철망으로 둘러막고 반동 협의자의 가족은 모조리 끌어다 3주일간 감금했다.
만일 이 3주일 내에 혐의자가 나타나 가족의 석방과 그 자신의 목을 교환하지 않는 한 그의 가족들은 유배당하는 것이다.
1922년 봄 반혁명 및 유언비어 단속 특별 위원회인 「체카」(후에 GPU로 개칭)는 교회에 간섭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티콘」 대사교가 체포됐으며 유명한 두 차례의 재판이 행해지고 곧 일련의 처형이 뒤따랐다.
그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티콘」대사교의 항의 내용을 유포한 사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페트로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베니아민」에 관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인「타냐·코데케비치」는 이렇게 썼다. 『기도하는 것은 자유다. 다만 신만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이 시 때문에 그녀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귀족과 군 장교들의 부인과 딸 중에는 뛰어난 인격적 자질과 매력적인 용모를 지닌 여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 어떤 여자들은 「체카」의 밀고자로 활약했다.
이들 중에는 그녀 자신이 정보원으로 활약했으며 그녀의 아들도 「솔로베츠키」섬에서 비밀 정보원으로 활약한 「비야셈스카야」공주 같은 사람도 있었다. 또 「콘코르디야·니콜라예프나·이오세」는 뛰어난 자질을 지닌 여자로서 장교였던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으며 그녀 자신도 「솔로베츠키」섬으로 유배당했으나 간신히 석방된 뒤「비양카」에 「살롱」을 하나 냈다. 이 「살롱」에는 「비양카」형무소 고위관리들이 자주 출입했는데 1937년 그녀는 이 「살롱」의 단골 고객들과 함께 다시 철창신세가 됐다.
29년 말엔 유명한 「골드·러쉬」가 시작되었다.
이 황금 파동에 체포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한때 『개인 사업』을 했거나, 소매상에 관련했던 사람들, 또는 공장에서 월급을 받았거나 GPU의 공제 조치에 의해 금을 저장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체포되었다.
이들을 어떻게나 정신없이 체포했던지 이들은 남자와 여자가 같은 감방에 쑤셔 박혀 대소변도 여럿이 쳐다보는데서 할 수밖에 없었다.
당국은 이들에게 짠 음식만 주고 물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선 누구든지 금을 내놓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었다. 냉수 한 그릇 값이 금 한 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쉽게 포기한 것은 실수였다.
그들은 죄수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금을 내놓았다고 믿질 않았다.
이러나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도 잘못이다. 잘못하면 그것으로 끝장이 나기 때문이다.
금 파동의 소용돌이는 이러했다. 그러나 29∼30년에 걸쳐서 『수탈 당한 「쿨라크스」의 파동이 엄청나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 규모는 너무나 엄청났으며 그 영향은 감옥 구석구석까지 퍼져 모든 죄수를 「굴라그」나라에 수송하는 문제로까지 번져갔다.
「러시아」의 전 역사를 통해 이 파동과 비교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된 재 정착이었으며 인종적인 큰 재앙이었다.
이 물결 속에서 출발부터 그 자들은 보금자리 전체 전 가족만을 깡그리 없애 버렸다. 그들은 심지어 14세, 10세는 말할 것도 없고 6세짜리 아이까지도 아무도 달아나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현대 역사상 어떤 경우에도 찾아볼 수 없는 처음 보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유대인을 처형한 「히틀러」에 의해 그후 되풀이 됐으며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거나 의혹의 대상이 된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한 「스탈린」에 의해 또 다시 반복됐다. 이윽고 「레닌그라드」로부터 「키로프」물결이 시작됐다. 「레닌그라드」시민의 4분의1이 1934년에서 35년 사이에 숙청된 것으로 추산된다.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과 그 통계를 발표할 생각이 있는 자들이 이 추산을 반박하려면 해보아라.
「예조프」의 사람들은 37, 38년 두 해 동안 50만명의 『정치범』이 소련전역에서 총살됐고 48만명에 이르는 기타 범죄자들이 처형됐다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광적인 사태인가? 이나마 최소한도로 어림 잡은 것인데도!(다른 소문으로는 39년1월1일까지 1백70만명이 총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군도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그저 한꺼번에 1천2백만명 이상 있은 적은 없다고 하는 게 옳을 게다. 그리고 이곳 정치범은 6백만명을 넘지 않았다고….
6백만명? 그렇다면 이는 「스웨덴」이나 「그리스」와 같은 자그마한 나라의 인구와 맞먹게 되는 셈이다. 【동양】

<소, 연이어 세 번째 「솔제니친」맹 비난>
【모스크바 4일 로이터 합동】소련 당국은 4일 연이어 세 번째로 소련의 「노벨」수상작가「알렉산드르·솔제니친」을 소련의 『유배자』라고 맹 비난함으로써 본격적인 『「솔제니친」박해 운동』에 들어갔다.
「모스크바」TV는 이날 저녁 「뉴스」시간에 「솔제니친」이 「파리」의 한 출판사를 통해 새 소설 『수용소 군도』를 발간, 소련을 비방하고 심지어는 『조국의 반역자들』까지도 옹호했다고 신랄히 비난했다.

<「자유 방송」, 『수용소 군도』곧 방송>
【뮌헨 4일 로이터 합동】소련 국내의 「라디오」청취자들은 곧 소련 저항작가 「알렉산드르·솔제니친」이 지난 주 비밀리에 「파리」로 원고를 빼 돌려 출판한 신작 소설 『강제 수용소 군도』를 방송을 통해 듣게될 것이라고 이곳에 본국을 둔 「자유 방송」이 4일 전했다.
미국의 재정지원 아래 「러시아」어와 다른 소련 내 소수 민족언어로 소련인들을 대상으로 방송하고 있는 자유 방송은 2, 3일 안으로 『포로 수용소 군도』의 출판인과 이 소설의 방송 낭독을 위한 판권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자유 방송 대변인이 밝혔다.

<솔제니친, 체포될 것을 이미 각오>
【파리 4일 UPI 동양=본사특약】「솔제니친」은 그의 새 작품 『수용소 군도』가 서방측에서 발간된 데 대해 『당국에 의해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최근 「모스크바」에서 그를 만나고 온 3명의 「프랑스」변호사가 4일 밝혔다.
「솔제니친」은 또 『나는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험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아왔다. 나는 이미 감옥 생활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견딜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고 「장·미셸·페라크」변호사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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