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되어야 할 현대의학의 역할-「사이언틱·아메리칸」지 특집 『생과 사』를 중심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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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의학이 급성질환과 상해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비교적 안전하게 보호하는데 성공을 거둔 것만은 틀림없다. 또 유아사망률을 줄이고 노인성질환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인간의 평균수명을 1930년대의 30세에서 70년대에 70세로 연장시킨 이른바 수명혁명을 일으킨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의사의 역할이 최근에 이르러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일까.
다음은 근 착 「사이언틱·아메리칸」지의 특집기사 『생과 사』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논의되는 안락사>
아직은 보편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안락사의 문제는 비교적 광범위하게 현대의학의 역할이 재평가되면서 논쟁의 초점이 되고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학적인 가치관의 변화로 지금까지 기대되었던 의학의 역할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면 된다는 종래의 가치체계가 삶과 죽음의 의미가 달라진 오늘날에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생각들이다.
이론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진보를 이룬 현대의학은 죽음을 막아주는데는 일단 성공하고 있다. 가령 심장과 호흡이 정지된 환자일지라도 전기 「쇼크」를 이용한다든지 해서 정지된 심장과 폐의 기능을 몇 번이고 되살려서 죽음을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안락사를 합리화하려는 의사들은 그러한 현대의학의 행위가 환자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악화시킬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60년대에 유행한 장기이식으로 달라진 「죽음의 정의」에 공명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생명현상은 「뛰는 심장과 숨을 쉬는 상태(호흡)」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의사들은 맥박과 호흡을 살아있는 지표로 삼고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죽음의 정의는 최근 강력히 대두된 「뇌사설」에 의해 크게 뒤흔들린바 있다. 살아있다는 징표는 호흡과 맥박이 아니라 의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뇌사설은 아무리 심장이 뛰고 숨을 쉰다 할지라도 의식활동이 중지되어 있는 상태라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애써 죽음을 막아서 환자에게 고통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편안한 죽음의 필로 인도해 주는 것이 의사들의 책임이라는 게 최근 숱한 반발과 공격 속에서도 비교적 광범위하게 공명을 얻고있는 안락사 문제의 요지이다.
이 같은 문제의 제기는 「죽어 가는 장소」를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야 한다는 운동과도 일맥 상통한다.
옛날에는 죽어 가는 장소가 자기 집 자기침대여서 온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여 결코 고독하지 않게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모두 함께 재음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결국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반성의 소리가 최근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한편 질병을 퇴치하는 의학의 핵심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진정한 행복>
지금까지 현대의학의 공격 타케트는 질병 자체였었다. 인간으로부터 건강을 빼앗고 고통을 주는 병원체만 잘 처리하면 인간에게 다시 행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그리고 못쓰게 된 장기는 건강한 것으로 갈아 끼우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애당초 기대와는 달리 현대의학이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안겨주는데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대의학이 지나치게 질병 자체에만 매달린 나머지 인간과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병폐만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병원이 당연히 요구하는 치료비가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환자를 해방시켜주는데 완전히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그가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없도록 가난하게 만들었다면 의학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받을까.
따라서 문제는 질병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제 의학은 질병 자체에만 매달리던 종래의 구원을 벗어나 삶의 질, 생활에 얽힌 문제, 균형과 평등 등 인간사회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면에 눈을 돌려야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래의 의학의 역할은 환자와 가족, 그리고 사회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건강문제를 공동으로 인지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서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는 면으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
의학은 본질적으로 삶의 문제는 생산적으로 그리고 죽음은 보다 안락한 것이어야 하며 결코 타인이나 사회에 참을 수 없는 불행한 짐을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도록 역할 수행을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의 공헌>
지금까지 사회는 의학이 불행스러운 예기치 않은 죽음과의 투쟁에 승리를 거둠으로써 인간에게 건강과 행복, 그리고 생산적인 삶을 약속해 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모든 것을 젖히고 최 우선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대서 의학은 신의 임무를 대항하는 분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의학이 죽음과 질병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건져낸 공로는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부족하다고 하겠다.
우선<표1>은 예기치 않은 죽음을 격감시킨 현대의학의 공로를 웅변하고 있다. 금세기 초에 무려 50%를 상회하던 유아사망률이 최근에는 2%미만으로 떨어진 것이다. 1930년대만 해도 모든 신생아는 15%가 사망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평균수명도 30세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모든 사람이 70세까지는 살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른바 수명혁명이 열어난 것이다.
현대의학이 수명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맨 먼저 인간을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계속된 공중 위생시설, 「백신」예방주사의 보급, 새로운 항생제의 개발, 개인의 영양과 위생상태의 개선 등은 전염병을 추방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암을 비롯한 몇 가지 성인병과 선천적인 잘못으로 초래되는 질병들, 그리고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질환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질병들이 현대의학 앞에 무릎을 꿇게 됨으로써 멀지 않은 장래에 인간은 지금보다 긴 수명인 1백세 이상을 넘겨다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욱이 유전자조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간합성의 꿈이 곧 실현되리라는 기대는 「완전인간」의 양산을 전제하고있어 지금까지 발휘해 오던 현대의학의 역할을 고무 찬양하는 듯 싶다.
그러나 의학이 창조의 기능까지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통렬한 반박은 접어두더라도 인간을 획일화하고 하나의 물질로서 간주하려는 의학의 태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피하기 어려운 것 같다.
도처에서 노출되고 있는 현대의학의 잘못은 종래의 질병 발생관과 인간을 획일화하고 물질로서 간주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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