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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방학|대표집필 이규호(연세대교수·교육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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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길고도 우울한 겨울방학>
이번 겨울방학은 뜻밖에도 비정상적인 긴 방학이 되었다. 대학생들은「데모」사태 때문이고 초·중·고학생들은 연료파동 관계로 알려졌다. 어느 경우에든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끝내고 즐거운 방학을 맞았다는 기분이 아니고 오히려 방학을 당했다는 기분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즐거운 방학을 맞아서 보람있는 계획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길고 우울한, 그리고도 초조한 방학을 맞은 느낌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불가피하게 그들의 방학동안의 생활을 통해서「민주적 사회질서」와「우리 국가의 운명」과「장기적인 에너지대책」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배를 타고 풍랑이 심한 대해를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방학은 정치교육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정치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올바른 정치의식과 참여의식, 그리고 올바른 행동규범을 습득시키는 교육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종래 정치교육을 일방적으로 반공교육에 그치고, 또한 구호만의 새마을교육을 내세웠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 만으론 민주시민으로서의 바른 정치의식·참여의식, 그리고 행동규범을 익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체계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정치교육을 조직화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국토가「이데올로기」대립으로 갈라져 있는 독일에선 정치교육을 연구하는 연구소들이 활발하게 그들의 실정에 맞는 정치교육을 연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교육을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이 각주마다 있어서 책임있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 부조리에 대한 항거>
학생들이「그룹」활동 같은 것을 통해서 늘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자유롭게 토의하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발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정치교육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학생들은 다른 모든 학생들과 대립적인 의견을 가졌을 때는 혼자서라도 자기의 의견을 자유롭게, 그리고 침착하게 발표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데모」사태에서 나타난 학생들의 의견과 주장은 우리나라에선 대체로 일방통행의 방식이다. 이러한 일방통행의 방식은 선동에 의해서 조종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토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그 무엇을 파괴하는 위력을 가졌을지라도 민주적인 질서를 확립하지는 못한다.
물론 이러한 사태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조직적인 정치교육을 소홀히 하고 자유로운 토의를 기피하고 억제한 정부에 있다.
본의 아닌 긴 방학을 맞고 나니 바른 정치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 모두가 절실히 느낀다. 우리나라의 현실과 이에 관계된 정확하고 믿을 만한 자료들을 학생들이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우리나라를 둘러싼 인접국가들의 정세와 그들의 문제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늘 국가의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희망을 가지고 질서 있게 행동하고, 자유롭게 토의하고, 건전하게 비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비판과 항거가 곧 창조와 건설과 직결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데모」사태에 대해서 책임있는 교육자들은 정치교육의 측면에서 반성해야 하겠지만 집권층은 이러한 사태를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항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를 일소하려는 과감한 결단 없이「데모」를 막는 특효약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춥고 길고 우울한 방학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방학동안에 무엇을 하나>
방학동안의 생활도 수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방학은 쉬고 놀고 즐겁게 여행하고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방학동안에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시간을 아끼면서 계획적으로 실력을 기르는 학습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대립적인 의견들은 사실은 모두 정당성을 가졌다. 방학동안의 생활도 교육적으로 계획되고 평가되고 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의 학생들의 생활과 방학동안의 학생들의 생활은 그 성격이 달라야 할 것이라는 데에는 모두들 일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구조가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1년을 통해서 혹은 학교생활을 하는 몇 년 동안 시간의 구조가 같은 생활을 하면 그것은 너무 단조로와서 쉽게 권태를 가져오고 자아창조를 위해서도 비료과적이다.
학기와 방학의 서로 다른 시간구조가 율동적으로 교체됨으로써 삶의 풍부한 내용이 이루어진다.
학기동안의 시간은 규칙적이고 기계적이다. 대체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식사를 하고「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는 시간표에 따라서 수업이 진행된다. 수업이 끝나면 어둠과 함께 집에 돌아와서 하루의 일과를 끝낸다.
그러나 방학동안의 시간은 자유롭고 자연적이다. 밤을 새우면서 흥미있는 책을 탐독할 수도 있고, 정한 시간만큼 독서를 하고 낮잠을 잘 수도 있고 배낭을 메고 무전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여름 같으면 바다로 산으로 홀홀히 떠나 버릴 수도 있다. 인생의 시간은 단조로와서는 안되고「리듬」이 있어야 한다. 조화 창조는 이러한「리듬」에서 가능하게 된다.

<미루던 일 해치울 기회>
그러므로 방학동안의 생활계획은 될 수 있는 대로 다채로운 것이 좋다. 그리고 자유를 위한 많은 공간을 남겨 두는 것이 좋다. 학생들은 특히 자기가 뒤떨어진 학과, 곧 수학이나 어학 등의 실력을 기를 수 있도록 계획을 짜야 한다. 교사들은 자기가 꼭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교사들도 오늘날처럼 지식과 기술이 빨리 발전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늘 독서를 하지 않으면 뒤떨어져서 전문직의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는 여행도 하고 친척도 방문하고 대자연을 즐길 수 있는 등산이나「캠프」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공업단지도 구경하고 하는 것이 좋다. 시간이 없어서 뒤로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방학이기도 하다. 인생은 길다고 하지만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기만 하면 결국 못하고 만다.
방학동안에 적당한 기회가 마련되고 적당한 여건들이 주어지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깊다.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해 주고 시골에 가서 계몽사업을 하고 의사가 없는 마을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크다. 이러한 봉사활동과 계몽활동은 앞에서 말한 정치교육을 위해서도 의의가 크다. 이러한 활동은 참여의식·공동체의식·협동정신 등을 길러 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이고 개척적인 인간성을 기르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실제적이고 창의적 계획>
그러나 봉사활동은 참으로 봉사가 되어야 하고 계몽은 실제로 계몽이 되어야 한다. 충분한 준비도 없고 여건도 맞지 않아서 봉사가 오히려 민폐를 끼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고 도움을 받아서는 안된다. 물론 도움도 주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봉사활동과 관광여행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편일률적으로 농촌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인습적이고 관례적인 행사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상황과 여건 아래서는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돕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여건아래서는 정직하게 시간을 즐기는 것이 좋다. 방학 때마다 늘 봉사활동만 독차지해서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물론 땀을 홀리고 피나는 봉사를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은 농촌에 가서 오히려 폐를 끼치고 돌아오는 일들이 많다.
겨울동안에는 특히 농촌에 일손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꼭 농촌봉사활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실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새로운「프로그램」을 생각해서「봉사」도 되고「자아실천」을 위한 교육적인 의미도 있도록 계획하는 것이 좋겠다.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 퇴계와 율곡의 서원들, 그리고 새로운 공업단지들을 구경하는 것은 방학동안에 학생들의 여행을 꼭 권하고 싶은 일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이 통행을 위협하고 있는 서해의 섬들을 방문해 보는 것도 의의가 크다.

<대학개혁의 세계적 조류>
아직도 개학날짜가 확정되지 않았다. 조기 방학을 했으니 조기개학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언제 개학을 할지 아직 모른다. 그리고 특히 대학에 있어서는 새 학기의 전망을 미리 예언하기는 매우 어렵다. 구속학생들이 석방되고 대학에 대한 사찰이 중지되었고 대학에는 자율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사찰도「사상」에 관한 것은 계속할 뜻을 내무장관이 비쳤고 자율의 성격도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다음 학기에 학생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전연 미지수다. 학생들이나 사회일각에서 내세우는 주장들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빈부 차의 극대화를 비난하면서「자유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지난날의 자유민주주의는 빈부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심층에 쌓인 욕구 불만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정부는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로서 그들의 요구불만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청산하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우리의 앞날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아니 대학이 세계적인 대학개혁의 조류를 따라서 참으로 효율적이고 현대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문교행정의 책임자들과 대학당국과 사회와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노력해야 될 것이다. 공장들이 잠시라도 문을 닫으면 그 손실은 눈에 띄게 나타난다.

<임시휴교의 막대한 손실>
그러나 학교들은 조기방학을 하고 임시휴교를 해도 거기에서 오는 막대한 손실은 눈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 우리 민족의 먼 장래를 생각하면 학교들이 문을 닫는 것이 공장들의 생산중단보다 더 손실이 크다. 우리는 모두 다음학기에 개학하게 되면 학원이 정상화 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과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에 다시 한번 우리의 교육체제를 더욱 합리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취학 전 아동교육의 문제·의무교육의 문제·직업교육과 일반교육의 연결 문제·정치교육의 문제·대학개혁의 문제·평생교육의 문제·선발제도의 문제 등 합리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되어 있다.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 지혜를 모으고 투자를 함으로써 교육자들도 그들의 생활에 더욱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국가와 민족의 장래가 바로 이러한 교육발전에 달려 있다. 앞으로의 과학적·기술적 혁명의 시대에 있어서는 경제성장도, 국방력도, 국력도 전적으로 교육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교육을 위해서 효율적으로 쓰는 돈을 소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장 믿음직한 투자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우리의 국가와 우리의 민족을 위해서 가장 장기적이고 가장 믿음직한 이익을 보강하는 투자라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돈만 쓰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것이다.

<이성적 질서 건설할 책임>
그러므로 체제의 효율화와 합리화와 더불어 투자를 증대시켜야 할 것이다. 당국은 교수들의 월급을 올리면 학생「데모」를 막아 줄 것이라고만 안일하게 잘못 판단하지 말기 바란다. 교수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교육의 체제의 개혁이며 이에 따르는 교육투자의 증대이다. 콩나물 교실·입시지옥·대학의 저질 등을 그대로 두고 교수들의 월급만 올리면 된다는 것은 너무 부패한 사고방식이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과 질서가 따라야 한다. 어떤 사회에서도 책임이 없고 질서를 건설하지 못하는 행동은 스스로 자유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약 당국이 참으로 학원의 자율을 보장하고 일체의 사찰을 지양한다면 이제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책임이 크다는 것 을 인식해야 될 것이다.
우리의 학원에 민주적인 깨끗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구습을 청산하고 갖가지 부조리를 물리치고 발전을 지향하는 이성적 질서를 건설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 사회의 하나하나의 기관들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민주화되기는 어렵다.
우리민족의 먼 장래를 생각하면 사실은 정치질서 보다도 대학의 질서와 학원의 질서가 더욱 중요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의 대학을, 우리의 학원을 참으로 이성과 양심이 지배하는 공동체제로 만드는데 모든 지혜와 힘과 땀을 바쳐야 할 것이다.
주제 방학
일시 1973년12월14일 하오3시
장소 중앙일보사 회의실
참석자(무순)
대표집필 이규호 (연세대교수. 교육철학) 유형진(대한교련 교육정책 위원장·건국대 교수) 서장석(경기고 교장) 김정순(숙명여중·고 교장) 김승한(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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